18일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아파트 주방. 60대 여성의 휴대전화에는 친구들과의 점심 약속 시간이 떠 있었지만, 식탁 위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아침 그릇이 남아 있었다.
거실에서는 남편이 TV 채널을 돌리다 말고 물었다.
“점심은 뭐 먹어?”
예전 같으면 그냥 넘겼을 말이다. 그러나 은퇴 뒤 매일 반복되는 질문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밥상, 세탁기, 청소기, 외출 시간까지 부부 사이의 오래된 역할 분담이 노년의 갈등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국가데이터처의 2025년 혼인·이혼 통계에 따르면 혼인지속기간 30년 이상 부부의 이혼은 1만5628건이었다. 혼인 4년 이하 부부의 이혼 1만4392건보다 1236건 많았다.
오랫동안 ‘신혼 이혼’으로 불리던 혼인 초기 이혼보다, 수십 년을 함께 산 뒤 갈라서는 부부가 더 많아진 것이다.
◆신혼보다 많아진 ‘30년 차 이혼’
1990년만 해도 혼인 4년 이하 부부의 이혼은 1만8053건이었다. 반면 혼인 30년 이상 부부의 이혼은 368건에 그쳤다. 당시에는 결혼 초기에 갈라서는 부부가 장기 결혼 부부보다 훨씬 많았다.
2025년에는 양상이 바뀌었다. 전체 이혼 건수는 8만8130건으로 전년보다 줄었다. 혼인 30년 이상 이혼은 오히려 늘었다. 전체 이혼 중 30년 이상 부부가 차지한 비중도 17.7%로 가장 높았다.
단순히 오래 산 부부가 많아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은퇴 이후 부부가 같은 공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자녀가 독립한 뒤 둘만 남는 시간도 늘었다. 그동안 생계와 양육 때문에 미뤄뒀던 감정이 노년에 다시 올라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은퇴 이후 집, 쉬는 곳이 아니었다
갈등은 대단한 사건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진 남편과 하루의 리듬이 달라지면서, 그냥 넘기던 말과 습관이 조금씩 부딪히기 시작한다. 오래 묻혀 있던 불편함도 그때 함께 올라온다.
직장생활을 이유로 집안일에서 한 발 물러나 있던 남편이 은퇴 뒤에는 냉장고 정리, 청소 상태, 식사 시간, 아내의 외출 일정까지 하나씩 말을 보태는 경우가 있다. 남편에게는 사소한 말일 수 있지만, 아내에게는 집 안에서조차 평가받는 느낌으로 남는다.
평생 가족 식사와 살림을 떠맡아온 여성들에게는 “이제는 나도 쉬고 싶다”는 감정이 강하게 남아 있다. 남편은 직장을 떠났지만, 아내의 노동은 끝나지 않는 구조다.
아침을 차리고, 점심을 묻는 말에 답하며, 저녁거리를 생각하는 하루가 반복되면 결혼 생활의 피로감은 더 또렷해진다.
문제는 밥이나 집안일 자체가 아니었다. ‘이 정도는 당연히 해주겠지’라는 말과 태도가 쌓이면서 마음이 먼저 닳기 시작한 경우가 많다. 그렇게 삼키고 넘긴 시간 끝에, 어떤 부부는 결국 이혼까지 고민하게 된다.
◆‘재산 분할’ 인식도 달라졌다
황혼 이혼 증가에는 경제적 배경도 있다. 과거에는 혼자 사는 노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불만이 있어도 결혼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여성의 경제활동 경험이 늘었다. 전업주부의 가사노동 기여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달라졌다.
이혼 과정에서 부동산과 예금뿐 아니라 요건을 갖춘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등 노후 소득도 분할 논의에 포함될 수 있다.
법원이 혼인 기간 동안의 기여를 폭넓게 보는 흐름도 영향을 미친다. 특히 황혼 이혼은 양육권보다 재산분할, 거주지, 연금, 생활비 문제가 더 큰 쟁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황혼 이혼은 단순히 감정이 식어서 벌어지는 일만은 아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지, 혼자서 생활비와 노후를 버틸 수 있을지, 지금 관계를 계속 이어가는 게 정말 편한 삶인지 하나씩 따져보다가 내리는 결정에 더 가깝다.
30년을 같이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결혼을 계속 붙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부부도 늘고 있다. 오히려 “앞으로 20년, 30년도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마음이 드는 순간, 미뤄왔던 결심을 서두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노후 부부에게 필요한 건 ‘거리감’
황혼 이혼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다. 서로의 하루를 덜 침범하는 태도부터 바뀌어야 한다.
은퇴한 남편에게 집은 ‘새 직장’이 아니다. 아내의 동선을 확인하고, 살림 방식을 평가하며, 외출 이유를 묻는 일이 반복되면 집은 쉬는 공간이 아니라 ‘긴장하는 공간’이 된다.
나이 든 부부에게 꼭 필요한 게 긴 대화만은 아니다. 괜히 캐묻지 않는 태도, 혼자 있고 싶은 시간을 건드리지 않는 배려처럼 서로 숨 쉴 틈을 남겨두는 게 더 편한 관계를 만들기도 한다.
가사도 마찬가지다. 아내가 평생 해왔다는 이유로 계속 맡겨둘 수는 없다. 식사 준비, 설거지, 세탁, 청소 중 일부라도 남편이 실제로 책임져야 한다. ‘도와준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같은 집에서 사는 만큼, 집안일도 한 사람 몫이 아니라 함께 나눠야 한다는 생각이 커지고 있다.
한 이혼 전문 변호사는 “요즘 황혼 이혼 상담을 보면 외도 문제보다 생활 스트레스 이야기부터 꺼내는 부부가 많다”며 “은퇴한 뒤 집에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사소한 말다툼이나 간섭이 반복되고, 그게 결국 관계가 멀어지는 계기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그냥 참고 사는 분위기가 강했지만, 지금은 재산이나 연금 분할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며 “남은 시간이라도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며 이혼을 고민하는 중장년층이 확실히 늘고 있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