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홍진 감독의 신작 ‘호프’에 마이클 패스벤더, 알리시아 비칸데르, 테일러 러셀이 캐스팅됐다는 소식은 그 자체로 영화계의 충격이었다. 패스벤더는 ‘셰임’, ‘노예 12년’, ‘스티브 잡스’ 등을 통해 동시대 최고 배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비칸데르는 ‘대니쉬 걸’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배우이자 패스벤더의 아내. 러셀 역시 티모시 샬라메와 호흡을 맞춘 ‘본즈 앤 올’로 2022년 베네치아국제영화제 신인배우상 격인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상을 받으며 급부상한 스타다.
그런 할리우드 배우들이 왜 한국 영화에, 그것도 외계 생명체 역할로 등장했을까. 17일(현지시간) 제79회 칸 국제영화제를 통해 공개된 ‘호프’에는 외계 생명체로 분한 이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영화 속 외계 생명체의 비중은 예상보다 크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은 모션 캡처와 페이셜 캡처 연기를 위해 한국을 직접 찾았다. 이들은 현장 모니터를 통해 자신의 표정과 몸짓이 실시간으로 크리처 캐릭터로 구현되는 과정을 확인하며 나홍진 감독과 세밀하게 의견을 주고받았다. 단순히 기술적 구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배우의 감정과 내면까지 캐릭터 안에 녹여내는 작업이었다는 설명이다.
18일 칸의 호텔 바리에르 르 마제스틱에서 열린 한국 취재진 공동 인터뷰에서 알리시아 비칸데르와 테일러 러셀은 낯선 작업 방식을 경험한 소감을 털어놨다.
러셀은 “크리처 연기의 좋은 점은 맞고 틀린 게 없다는 것”이라며 “몸을 조금 이상하게 움직이거나 평소와 다른 움직임도 허용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자유롭게 즐기며 연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비칸데르는 “바디수트를 입고 얼굴 대부분을 덮는 장비를 착용한 채 연기해야 했다”며 “눈앞에 카메라가 있지만 없는 것처럼 무시하면서 상대 배우를 바라봐야 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처음에는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흥미로운 작업이었다”고 덧붙였다.
비칸데르는 이날 인터뷰 전 열린 ‘호프’ 경쟁 부문 공식 기자회견에서 오래전부터 나홍진 감독의 팬이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비칸데르는 장편 영화 데뷔작 ‘퓨어’로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며 한국을 찾았는데, 그때 아시아 영화에 완전히 빠져 이후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와 ‘황해’를 찾아봤고, ‘곡성’도 개봉 당시 극장에서 봤다는 것.
이날 인터뷰에서 비칸데르는 “아시아 영화만이 가진 대담함과 용감함에 매료됐다”며 “서구 영화들은 아무리 뛰어나도 일정한 규칙 안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은데, 아시아 영화들은 그 선을 과감하게 지워버린다. 나홍진 감독은 그런 스타일을 가장 잘 보여주는 감독 중 하나”라고 했다.
그는 “‘호프’에서는 나 감독이 자신이 사랑하는 장르들을 자유롭게 섞고 탐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며 “팬이자 관객으로 굉장히 흥미로운 경험이었다”고 평가했다.
비칸데르의 남편 패스벤더 역시 이날 기자회견에서 특유의 유머를 섞어 출연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왜 ‘호프’에 출연했냐고요? 아내가 하라고 해서요”라며 웃은 뒤 “나홍진 감독과의 작업이 흥미로운 이유는 영화가 어디로 흘러갈지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 이런 예측 불가능함은 정말 드문 영화적 경험”이라고 말했다.
러셀은 ‘호프’의 의외의 매력으로 “유머”를 꼽았다. 그는 “굉장히 웃긴 영화였고, 영화를 보는 내내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이어 “인간들이 얼마나 무지하고 답답하고 바보 같은 행동을 하는지를 영화가 유머로 보여주는데, 그 부분에 깊이 공감했다”고 부연했다.
‘호프’는 후속편 가능성을 암시하며 끝난다. 나홍진 감독 역시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를 써놓은 것이 있다”며 “기회가 된다면 만들고 싶고, 그 기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혀 세계관 확장 가능성을 공식화했다.
비칸데르는 “나 감독은 이미 굉장히 거대한 세계관을 갖고 있다”며 “이번 이야기는 더 큰 서사의 빙산의 일각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 2년 동안 나 감독과 대화를 이어오며 결국 우주로 향하는 이야기까지 구상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며 “이번 작품이 더 거대한 세계로 향하는 관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러셀 역시 “아직도 제 캐릭터는 많은 부분이 미스터리”라며 “기회가 된다면 이 세계관 속 더 큰 이야기를 계속 발견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홍진 감독은 함께 작업해본 감독 중 가장 사람을 놀라게 하는 감독입니다. 또 다른 이야기로 다시 한 번 관객을 놀라게 할 준비가 된 분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