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국학진흥원은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옛 책 표지를 장식하던 능화판 가운데 ‘卍(만) 자문’이 지닌 의미를 조명하고 조선시대 책문화에 남아 있는 불교적 상징과 전통 미감을 소개했다.
능화판은 책 표지에 문양을 찍어내기 위해 사용한 목판이다. 조선시대 전적의 책을 꾸미고 묶는 방식인 장정 문화에서 실용성과 심미성을 함께 보여주는 도구였다.
◆책 표지에 새겨진 전통의 무늬 ‘능화판’
19일 한국국학진흥원에 따르면 능화판으로 찍어낸 표지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능화표지는 표지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동시에 책을 습기와 충해로부터 보호하는 기능도 함께 지녔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능화표지 제작에는 황염인 곧 노랗게 물들인 종이와 배접지, 교말, 밀랍, 능화판 등이 사용됐다. 밀랍은 문양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광택과 방습 효과를 더했다.
염색에 쓰인 황벽과 치자는 방충·항균 성분을 지녀 책의 보존성을 높였다. 이런 점에서 능화표지는 조선시대 책 문화가 보여주는 실용성과 심미성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책문화 속에서 널리 쓰인 卍 자문
책 표지에 나타나는 다양한 문양 가운데서도 卍 자문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조선 초기에는 연보상화문과 연화문이 많고 귀갑문이 바탕문으로 주로 쓰였으나 조선 중기에 이르면 卍 자문이 널리 사용됐고 조선 말기에는 대부분 卍 자문이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서 1200여권의 능화표지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卍 자문은 전체 문양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卍 자문이 일시적 유행을 넘어 조선 후기에 매우 익숙하고 선호된 책 표지 문양이었음을 보여준다. ‘주역천견록’과 ‘동의보감’ 등의 표지에서도 연속 배열의 卍 자문이 확인되는데 이 문양이 불서에만 국한되지 않고 의서·유서·근대 전적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쓰였음을 보여준다.
◆억불의 시대에도 이어진 불교 상징의 흔적
조선시대 책 표지에 卍 자문이 지속적으로 쓰인 배경은 능화표지의 연원과 무관하지 않다. 능화표지는 고려시대 사경과 불전의 표지 장식 전통과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됐다. 경전을 장엄하던 감각이 일반 전적의 표지를 꾸미는 방식으로도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원래 卍 자는 산스크리트어로 스바스티카라 한다. 불교에서는 상서롭고 길한 뜻을 지닌 상징이자 부처의 경지를 나타내는 불심인으로 이해됐다. 조선이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다고 하더라도 생활문화와 공예, 장정 관행까지 불교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卍 자문은 오랜 시간 불교 상징으로 쓰이면서도 점차 길상성과 장엄성을 지닌 장식 문양으로 폭넓게 수용됐다. 반복 배열이 쉬운 기하학적 특성까지 더해져 책 표지 문양으로 지속적으로 활용됐다는 게 한국국학진흥원의 설명이다.
조선시대의 卍 자문은 단순한 종교 표식을 넘어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도 전통과 미감, 실용성이 함께 작동하며 계승된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국학진흥원 관계자는 “능화판의 문양은 책 표지를 꾸미는 장식을 넘어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과 미감, 그리고 책을 대하는 태도를 담고 있다”며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소개하는 卍 자문 능화판은 우리 전통문화에 남아 있는 불교적 상징의 한 사례이자 조선시대 책 문화의 깊이와 품격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