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계약은 당사자끼리 서명한 종이계약서를 나눠 가지는 것으로 이뤄진다. 가장 오래 통용된 방법이지만, 그만큼 단점도 많다. 계약서를 분실할 경우 계약 자체를 입증할 길이 사라지기도 한다. 누군가 마음먹고 정교하게 계약서를 변조하면 낭패를 당하기 쉽다. 종이에는 변조 기록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이계약서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최근 등장한 서비스가 ‘전자계약’이다. 디지털 파일 형태로 저장돼 분실 우려가 적고, 계약서를 수정하면 기록이 모두 남아 누가 조항을 바꿨는지 바로 알 수 있다.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국내 전자계약 시장을 선도하는 스타트업이 있다. 부산을 기반으로 한 정보기술(IT) 기업 ‘모두싸인’이다. 모두싸인은 부산대 법학과 출신 이영준(39) 대표가 2015년에 설립했다.
이 대표는 20대 중반까지 법조인을 꿈꾸며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개인 사정으로 시험을 더 이상 준비하기 어려워지면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진로를 고민하던 중 ‘애플리케이션’(앱)이 눈에 들어왔다. 스마트폰 사용자가 늘면서 카카오톡을 비롯한 앱이 쏟아지던 시기였다. 호기심에 대학 동아리에 들어가 앱 개발을 직접 해봤다. 곧 흥미를 붙인 이 대표는 개발자의 길로 방향을 틀었다. 일반 개발자보다 자신만의 앱을 만들고 싶던 그는 취업이 아닌 창업을 택했다.
“앱을 만드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이 일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개발 동아리 친구들에게 최신 맥북을 사주며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비싼 선물이 통한 덕인지 친구들이 흔쾌히 합류했어요. 그렇게 대학 앞 원룸에 사무실을 차리고 창업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법학 전공자답게 먼저 변호사와 소비자를 연결해 주는 서비스를 개발했다. 야심차게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시장의 벽은 높았다. 이미 비슷한 서비스들이 벌써 자리 잡고 있었던 데다 변호사와 소비자 모두 반응이 미지근했다.
사업을 그만둘까 고심하던 그는 소비자들의 법적 분쟁 대다수가 종이계약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무릎을 쳤다. 변호사들과 소비자들을 만나며 시장조사를 진행했다. 대안이 없어 종이계약서를 쓰고 있지만, 대체재가 나타나면 충분히 바꿀 의향이 있다는 응답을 받았다. 전자기기에 넣을 전자계약서를 만들면 충분히 통하겠다고 생각한 이 대표는 공을 들인 끝에 전자계약 서비스 ‘모두싸인’을 내놨다.
종이로만 가능했던 계약을 언제 어디서나 링크 한 줄로 체결할 수 있게 한 모두싸인은 빠르게 시장에 안착했다. 누적 이용자 1000만명을 넘어서며 국내 대표 전자계약 서비스가 됐다. 성장 가능성을 알아본 투자자들 관심으로 투자 유치액도 321억원에 달한다.
이는 ‘지역 기업’에 대한 차별의 벽을 극복한 성과여서 이 대표의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에 따르면, 본사가 부산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영업 과정에서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부산 기업이라고 하면 ‘IT 기술이 떨어질 것 같다’며 미팅 시간 내내 광안리 이야기만 하다 끝난 적도 있어요. 신생 기업인 데다 재무적으로 탄탄하지 않으니 ‘서비스가 종료되면 어떡하냐’는 의심도 끊이지 않았죠.” 이 대표는 결과로 증명하고 싶었다. 고객사를 한 곳씩 늘려가며 신뢰를 쌓았고, 서비스의 안정성과 기술력으로 ‘부산 기업’이라는 편견을 깨나갔다.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지금도 모두싸인 본사는 여전히 부산에 있다.
“‘부산에서는 IT 기업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아 있었어요. 제가 증명한다면 부산에서도 훌륭한 IT 기업이 나올 수 있다는 선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