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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인간·식물·AI가 풀어낸 ‘詩의 하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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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미술관서 열린 ‘가설의 정원’
관객이 시 낭독하고 AI도 협업
접속의 시대 감각형 전시 신선
‘생성하는 예술’ 가능성 보여줘

‘길’이라는 글자 속에는 길의 모양이 들어 있다. ‘ㄱ’의 꺾인 길, ‘ㅣ’의 곧은 길, ‘ㄹ’의 꼬불꼬불한 길. 이렇게 완벽한 이미지를 품은 글자가 있을까. ‘ㄱ’의 꺾임은 좌절 같고, ‘ㄹ’형의 구불구불한 길은 설렘과 망설임을 함께 품고 있다. 이 굽은 길의 느린 속도는 효율성과는 무관해도 우리 몸의 감각을 가장 많이 일깨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지향해온 길은 곧은 길이었다. 호쾌하게 뻗은 길의 속도감과 안정감을 여태 추구해 왔다.

그런데 속도를 추구하는 마음이 더 커지면서 언젠가부터 ‘길’이라는 말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길보다는 더 속도감 있고 인공적인 ‘도로’가 많아졌다. 내비게이션은 점점 정교해지고, 사람들은 지도를 더듬으며 헤맬 필요가 없어졌다. 산길, 골목길, 오솔길 같은 낱말은 옛말처럼 느껴지고, 이 낱말 속에 있던 미궁의 이미지도 희미해진다. 생각해 보면 예전의 길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었다. 길에는 떠남과 귀환이 있었고, 한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 묻어 있었다. 때로는 헤매게도 했지만 그 우회가 인간의 이야기를 만들고 문학이 되기도 했다.

천수호 시인
천수호 시인

하지만 지금 우리는 길보다 링크를 더 자주 누른다. 물리적 이동의 시대가 지나가고 우리는 접속의 시대를 살고 있다. 삶은 하나의 선형적인 서사보다, 감각과 정보가 동시에 스며드는 네트워크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최근 서울교대 샘미술관에서 열린 ‘인간?식물 ? 가설의 정원’이라는 전시회와 이 전시의 오프닝 낭독회 ‘식물-되기의 언어’는 이런 시대감각을 매우 선명하게 드러낸 행사였다.

이 전시에는 김혜성, 김훈철, 윤정원, 이호영, 정규리의 다섯 작가가 참여했다. 천, 쌀, 도예, 식물, 영상을 오브제로 삼아 구성한 정원은 현대적 감각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길처럼 관객을 특정한 목적지로 데려가는 게 아니라, 기억과 시간과 생명의 층위가 함께 움직이는 가설의 정원이었다.

이번 낭독회도 ‘가설의 정원’이라는 공간을 체험하기에 충분했다. 나와 김서치, 이형초 시인이 서로의 시를 쪼개 언어의 씨앗을 만들고, 관람객들에게 한 행씩 낭독하게 했다. 동시에 인공지능(AI)은 세 사람의 시를 혼합해 또 다른 한 편의 시를 생성했다. AI 시는 작위적인 언어놀이처럼 과장되거나 어색한 부분도 있었다. 그렇지만 놀라울 만큼 일관된 흐름으로, 완성도 있게 시를 합성해 내어 우리를 놀라게 했다. 무엇보다 이 행사에서 인간의 언어와 기계의 언어가 하나의 무대 위에서 협연하는 느낌이 들어 신선했다.

여기에 또 하나 더해진 것이 관람객의 목소리로 낭독하는 시의 맛이다. 정원에 뿌리내린 한 그루의 나무가 처음 듣는 새의 울음에 귀 기울이듯, 시를 읽는 낯선 목소리의 떨림을 세밀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시는 종이 위에 있을 때와 목소리로 읽힐 때 전혀 다른 감각을 준다. 낭독에는 그 사람만의 숨결과 떨림, 머뭇거림이 함께 실린다. 어떤 구절은 발화되는 순간 공감의 전율이 오기도 하고, 어떤 침묵은 문장보다 더 오래 긴장감으로 남는다.

낭독을 하다 보면 더 절실히 느껴지는 것이 있다. 시는 단순히 ‘만들어진 언어’가 아니라, 한 존재가 자기 삶을 통과시킨 흔적이라는 점이다. 이 지점은 AI 시가 건드릴 수 없는 부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앞으로는 공존할 수밖에 없는 운명처럼 느껴진다. 정원은 길과 다르다. 길이 출발과 도착을 전제한다면, 정원은 증식과 공존을 전제한다. 식물은 목적지를 향해 걷지 않는다. 대신 빛과 습도, 균열의 방향으로 몸을 조금씩 기울이며 자란다.

이번 낭독회를 통해 한 가지 질문이 선명해졌다. 시에 있어서 인간과 AI가 앞으로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이 행사에서 분명해진 것은 인간과 AI가 서로를 대체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생태 안에서 얽히고 반사하며 새로운 감각을 함께 생성해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어쩌면 앞으로의 예술은 더 이상 길의 형식을 따르지 않을지 모른다. 정답을 향한 직진보다 서로의 감각을 교차시키는 일이 더 중요해질지 모른다.

 

천수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