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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간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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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부터 ‘바냐 아저씨’·‘세 자매’·‘벚꽃 동산’까지 안톤 체호프(1860~1904) 작품에 연극인이 갖는 애정은 각별하다. 연출·작가들은 끊임없이 그의 작품을 연구하고, 배우들은 체호프 배역을 한 번쯤 맡고 싶어한다. 인물의 내면을 설명하지 않기에 배우에게는 무한한 해석의 여지를 주고, 연출가에게는 희극과 비극 사이 어디서든 작품을 세울 수 있는 자유를 준다. 어리숙하고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답답하기까지 한 인간 군상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나 이식할 수 있는 보편성이 체호프 작품의 생명력이다.

 

‘반야 아재’. 국립극단 제공
‘반야 아재’. 국립극단 제공

◆국립극단의 ‘반야 아재’, LG아트센터의 ‘바냐 삼촌’

 

스타니슬라프스키가 1899년 러시아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공연한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역시 세계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는 연극 중 하나다. 러시아 시골 영지를 무대 은퇴한 교수의 귀향이 촉발하는 가족 내 균열을 그린 담백한 작품이다. 그런데도 127년째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이유는 단순하다. 체호프가 던진 물음이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헛되이 흘러간 청춘과 이루지 못한 사랑, 희생의 무게, 그럼에도 내일을 살아내야 한다는 삶의 굴레는 누구도 비껴갈 수 없다.

 

그래서인지 올해 국내에서 국립극단과 LG아트센터가 이 작품을 각각 공연중이다. LG아트센터는 이달초부터 손상규 연출의 ‘바냐 삼촌’을 무대에 올렸고 국립극단은 조광화 번안·연출의 ‘반야 아재’를 22일 개막했다.

 

두 곳이 한 작품을 두고 벌이는 흥행 대결은 처음이 아니다. 23∼24년 ‘벚꽃 동산’, 25년 ‘헤다 가블러’(헨리 입센) 때부터 시작된 확률로 따지기 힘들만큼 희박한 ‘우연’이다. 관객 입장에선 국내 공연계를 대표하는 두 무대의 고전 재해석을 비교할 기회다. 특히 이전에 비해 두 무대가 지닌 개성이 올해는 뚜렷하게 엇갈린다.

 

‘바냐 삼촌’. LG아트센터 제공
‘바냐 삼촌’. LG아트센터 제공

손상규 연출의 ‘바냐 삼촌’은 특정 시대나 장소에 갇히지 않는 보편성에 주목했다. 19세기 러시아 시골 영지 이야기를 현대의 언어와 감정으로 재해석하되 역사적 배경은 배제하다시피 했다. 점·선·면의 미학으로 구성한 미니멀한 무대 위에서 등장인물간 서사가 그들의 시선, 호흡과 함께 선명하게 드러난다.

 

반면 조광화 연출의 ‘반야 아재’는 대대적인 각색을 택했다. 무대는 1939년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의 시골 정미소와 농장이다. 주인공은 젊은 시절 반야사(般若寺)로 출가했다가 환속한 탓에 ‘반야 아재’로 불리게 된 박이보. 그가 청춘을 바쳐 지켜온 정미소가 집안의 생계를 떠받치고, 그 주변에는 일제 순사들이 어른거리며 식민지 조선의 긴장을 드리운다. 러시아 교수는 보성전문학교 영문과 교수로, 그의 새부인 엘레나는 대구 출신으로 동경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한 신여성으로 바뀌었다.

 

‘바냐 삼촌’. LG아트센터 제공
‘바냐 삼촌’. LG아트센터 제공
‘반야 아재’. 국립극단 제공
‘반야 아재’. 국립극단 제공

◆미니멀 대 스펙터클

 

두 작품은 무대에서도 개성차가 크다. ‘바냐 삼촌’은 벽과 현관, 의자와 테이블 등 최소한의 구조물로 무대를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인물의 내면과 관계의 변화에 관객 시선이 집중된다. 이서진(바냐 삼촌 역)과 고아성(소냐 역), 양종욱(의사 아스트로프 역)과 이화정(엘레나 역), 네 인물의 감정선이 무대를 가득 채운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전개는 결말에서도 무리 없이 보는 이 가슴에 스며드는 피날레로 이어졌다. 어느 순간 등장인물과 배우 본체가 동일시될 정도인 이서진 특유의 ‘생활연기’를 활달하고 귀여운 캐릭터를 빚어낸 고아성이 뒷받침해준다. 전통적으로 ‘조용하나 강인한 여성’으로 연기돼온 인물을 고아성은 전혀 다른 결로 해석해 새로운 소냐상을 제시했다.

 

“우리 살아봐야지, 삼촌. 우리 살아보자. 모든 걸 묵묵히 견뎌내 보자. 그러다 우리 마지막 순간이 오면 우리 천국에 가서 이야기하자.”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후 이처럼 담담하게 읊조리는 마지막 독백을 통해 고아성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반야 아재’. 국립극단 제공
‘반야 아재’. 국립극단 제공

국립극단의 ‘반야 아재’는 명동예술극장이 아닌 해오름 극장에서 공연중이다. 해오름 무대 면적(1200㎡)은 LG시그니처 홀(687㎡)의 약 두배. 애초 연극에겐 힘겨운 무대다. 체호프 희곡이 요구하는 배우의 표정과 침묵, 클로즈업 같은 감정 집중을 객석에 전달하는 건 더욱 어렵다. 

 

대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무대디자이너인 이태섭은 한가로운 전원을 실감할 수 있는 공간을 구현했다. 무대 중심에 연못과 누마루를 배치하고 우측엔 2층 높이의 정미소를 앉혔다. 여기에 무대 3면을 담벼락으로 둘러싸서 배우들은 낮은 담장을 넘어 등장하고 연못가를 거닌다. 극 중반에는 여름비가 거세게 내리고 작두펌프에서 나오는 물로 배우들은 발을 씻고 아궁이에서 익힌 감자를 먹는다. 4막에서는 정미소 내부가 드러나며 수확 벼가 박이보 머리 위로 쏟아지고, 그 속에서 구출된 박이보에게 서은희(소냐)가 읊조리는 마지막 독백이 펼쳐진다.

 

조성하(박이보 역)·심은경(서은희 역)·남명렬(서병후 역)의 노련한 연기가 돋보였지만 서사 집중력이 떨어지는 구간도 뚜렷했다. 개막 첫날엔 배우 간 호흡이 맞지 않는 장면도 눈에 띄었다.

 

◆“살아봐야지”와 “살아나가요”

 

설정·무대 등이 다르지만 초중반까지 비슷하게 전개되던 두 작품 서사는 결말에선 뚜렷하게 다른 결을 만들어낸다. ‘바냐 삼촌’은 한바탕 소동 끝에 다시 찾은 평온한 일상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면 ‘반야 아재’는 어찌할 수 없는 처지에 절망하는 쪽이다. ‘바냐 삼촌’의 소냐가 삼촌 손을 잡을 때 객석에는 담담한 위로가 스민다. ‘반야 아재’의 서은희는 다르다.

 

“우리 살아가요. 힘겨운 낮과 기나긴 밤들이 영원히 반복되어도, 하루하루 살아나가요. 업보라 여기고, 가시밭길을 한 발 한 발 걸어가요. 저 세상에서 돌아보면 되죠.” 

 

위로 대신 절망을 직시하라는 요구다. 한 원작에서 나온 두 작품이 서로 다른 결로 마무리된다. 

 

두 작품 모두 공연장이 대극장인 만큼 마이크와 스피커 등 확성 장치 사용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다만 연극 무대에서 확성의 핵심은 증폭 자체가 아니라 현존감의 유지다. 관객은 소리가 배우에게서 나온다고 느껴야한다. 마이크·스피커의 존재가 느껴진다면 배우와 관객 사이에 벽 하나가 생긴 것이다.

 

해오름은 확성으로 인한 위화감이 크지 않았다. 반면 LG 시그니처 홀은 마치 텔레비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리가 배우의 몸보다 스피커에서 먼저 왔고, 이는 2024년 ‘벚꽃 동산’ 때도 비슷한 경험이었다. 연극은 배우의 몸과 목소리가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한다. 

 

‘바냐 삼촌’, ‘반야 아재’ 모두 3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