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메뉴 보기 검색

삶 속에 살아있는 예술… 고로 인류는 진화한다

세계 뮤지션들과 협업한 英 거장
“예술은 인간의 감정·상상력 자극”
고대 동굴벽화부터 SNS 문화까지
난해한 용어 대신 일상 통해 설명

예술은 일부 천재들 전유물 아닌
화장·패션 스타일도 범주에 포함
공동체 유지·발전 위해 주요 역할
“문명도 집단 상상력의 산물이다”

예술은 무엇을 하는가/ 브라이언 이노·베테 아드리안스/ 김희정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만원

 

콜드플레이, U2, 데이비드 보위 등과 협업한 영국의 음악가이자 프로듀서, 예술 사상가인 브라이언 이노와 네덜란드 예술가 베테 아드리안스가 함께 펴낸 이 책은 “우리는 왜 예술을 하는가”, “예술은 왜 필요한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내 든다. 저자는 예술이라는 추상적 주제를 난해한 철학 용어 대신 일상의 사례를 통해 쉽고 흥미롭게 설명한다.

저자들은 예술을 미술관 속 작품이나 소수 전문가의 영역으로 제한하지 않는다. 티셔츠 문구와 SNS 밈, 농담, 물건의 장식, 헤어스타일과 같은 우리의 일상 전체를 예술의 영역으로 바라본다. 그러면서 “예술은 인간이 감정을 만들고, 타인과 연결되며, 지금의 현실 너머 가능성을 상상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게티이미지뱅크·생성형 AI 이미지
저자들은 예술을 미술관 속 작품이나 소수 전문가의 영역으로 제한하지 않는다. 티셔츠 문구와 SNS 밈, 농담, 물건의 장식, 헤어스타일과 같은 우리의 일상 전체를 예술의 영역으로 바라본다. 그러면서 “예술은 인간이 감정을 만들고, 타인과 연결되며, 지금의 현실 너머 가능성을 상상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게티이미지뱅크·생성형 AI 이미지

컵은 물이 새지 말아야 하고, 의자는 앉기 편해야 하며, 비상구 표시는 누구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사물의 기능은 명확할수록 좋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예술은 이러한 기능의 반대편에 존재한다. 불필요한 장식, 난해한 색감, 비뚤어진 형태, 설명하기 어려운 취향까지도 모두 예술이 될 수 있다. 인간은 바로 그 비효율과 쓸모없음 속에서 자신만의 감각과 자유를 발견해왔다.

저자는 드라이버를 예로 들어 예술을 설명한다. 드라이버의 날은 나사를 돌리는 기능을 수행해야 하므로 특정한 모양과 크기, 강도를 갖춰야 한다. 그러나 손잡이는 다양한 색과 재질, 형태로 만들 수 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예술’의 가능성이 생긴다. 예술은 기능의 의무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며, 기능적 제약이 적을수록 표현의 폭은 더 넓어진다는 것이다.

브라이언 이노·베테 아드리안스/ 김희정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만원
브라이언 이노·베테 아드리안스/ 김희정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만원

이노는 “예술은 이미 우리 삶 속에 있다”고 강조한다. 소설, 조각, 음반, 그림, 영화, 발레, 연극, 시, 오페라 같은 전통적인 예술뿐 아니라 사람들이 옷을 입는 방식, 헤어스타일을 고르는 취향, 농담을 주고받는 순간, 춤추고 노래하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밈을 만드는 행동까지 모두 예술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설명한다.

예술은 일부 천재 예술가만의 고급문화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種)이 본능적으로 수행해온 감정의 언어라는 것이다. 화장하고 장신구를 선택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춤추고 음악을 즐기는 일상 역시 예술 활동의 일부라고 본다.

이노는 예술의 핵심 기능을 “감정 시뮬레이션”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은 소설 속 주인공이 되어 감옥의 공포를 느끼고, 영화 속 이별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며, 음악 한 곡을 통해 오래된 기억 속으로 돌아간다. 실제로 경험하지 않아도 예술을 통해 감정을 미리 체험하는 셈이다.

그는 이러한 과정이 인간 사회의 진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위험한 현실을 직접 겪지 않고도 감정을 연습하고 공감 능력을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간은 예술을 통해 타인의 삶을 살아본다. 전쟁 영화는 전쟁터의 공포를 간접 체험하게 하고, 문학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들인다. 음악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불러내고, 그림은 언어 이전의 세계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저자들은 이러한 경험이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인간 정신을 성장시키는 훈련 과정이라고 말한다.

책은 뇌과학과 인류학, 심리학, 음악, 철학을 넘나들며 예술의 기원을 추적한다. 원시 동굴벽화에서 현대 SNS 문화까지 이어지는 인간 표현의 역사를 보면 인간은 언제나 무언가를 꾸미고 장식하며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저자들은 예술을 생존과 무관한 사치가 아니라 인간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 활동으로 해석한다. 공동체는 결국 함께 공유하는 감정과 상상력 위에서 유지된다는 것이다.

책의 시선은 정치와 사회로도 확장된다. 독재 정권이 왜 예술을 검열하는지에 대한 분석은 인상적이다. 권력은 예술이 지닌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노래 한 곡이 혁명을 일으키고, 영화 한 편이 시대의 인식을 바꾸며, 소설 한 권이 금기를 흔들 수 있다. 예술은 사람들의 감정과 상상력을 움직이며, 인간은 상상할 수 있는 세계를 결국 현실로 만들려 한다. 이런 점에서 저자들은 문명을 “집단적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책은 오늘날 인공지능(AI) 시대와도 깊이 맞닿아 있다. 생성형 AI가 그림과 음악, 글을 빠르게 생산하는 시대에 인간 예술의 의미는 무엇이냐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예술의 핵심이 단순한 기술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감정을 나누고 새로운 감각을 경험하게 하는 능력이다. 인간은 정보를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라 감정을 공유하는 존재이며, 예술은 그 연결의 중심에 있다.

책을 덮고 나면 인간은 왜 끝없이 노래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며 이야기를 쓰는지, 왜 전쟁과 재난 속에서도 예술이 사라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하나의 답을 얻게 된다. 예술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오래된 기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