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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바퀴의 기도, 한국 축구의 한 시대를 품다 [종교칼럼]

한 시대가 저물었다. 성남일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박규남 전 성남일화 사장이 지난 5월 25일 향년 89세로 성화(별세)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단지 수많은 우승컵 때문만이 아니라, 경기 전 운동장을 돌며 감독과 선수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불러 기도하던 한 노인의 모습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에게 ‘일곱 바퀴’는 성경 속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을 돌자 성이 무너졌다는 이야기에 대한 깊은 믿음이었다. 그는 그런 마음으로 매 경기 팀과 선수들을 위해 기도했다. 축구는 그에게 직업이 아니라 소명이었다.

 

박규남은 선수나 감독 출신이 아니었다. 통일교회 목회자로 활동하던 그는 1988년 문선명 총재의 부름을 받고 축구단 창단 작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그의 나이 쉰한 살. 축구 문외한에 가까웠지만,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이후 25년 동안 한국 프로축구의 역사를 바꾸는 여정으로 이어졌다. 성남일화는 K리그 7회 우승, 아시아클럽선수권 2회 우승 등 모두 24개의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한국프로축구를 대표하는 명문 구단으로 성장했다. 신태용, 이상윤, 김도훈, 고정운, 신의손(옛 사리체프), 김상식, 정성룡 등 숱한 스타 선수들이 이 팀을 거쳐 갔다. 성남일화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이기는 축구’의 상징이었다.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그는 단지 구단 운영자에 머물지 않았다. 1991년부터 2004년까지 대한축구협회 이사를 지냈고,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와 킹스컵 국가대표팀 단장을 맡았다. 또 한국프로축구 단장협의회 의장과 한국프로축구연맹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한국 축구 행정의 중심에서도 역할을 했다. 대한축구협회 공로상을 두 차례 받은 것도 그의 공헌이 단순한 종교 구단 운영 차원을 넘어섰음을 보여준다. 많은 이가 성남일화의 화려한 성적을 기억하지만, 그 이면의 고독과 헌신은 잘 알지 못한다. 그는 늘 스포트라이트 뒤에 있었다. 손익 계산보다 우승과 팀을 먼저 생각했고, 선수와 감독을 향한 책임감으로 움직였다. 공개석상에서는 직원들을 엄하게 꾸짖기도 했지만, 뒤에서는 따로 불러 다독여주던 따뜻한 사람이었다는 회고도 남아 있다.

 

특히 그의 삶은 통일교회와 한국 축구가 만들어낸 독특한 관계사를 보여준다. 성남일화는 오랫동안 ‘종교 구단’이라는 색안경 속에서 평가받았다. 2003년 피스컵 창설 당시 그는 유능한 실무진과 함께 대기업 후원 유치에 나섰지만, 번번이 벽에 부딪혔다. 실무진 단계에서는 호응을 얻었으나 최종 결재 과정에서 무산되는 일이 반복됐다. 그는 훗날 당시를 떠올리며 “무척 슬프고 서러웠다”고 회고했다. 성남 율동공원 인근 통일그룹 소유 부지에 클럽하우스를 세우려 했던 계획도 결국 관청 허가를 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누구를 원망하기보다 “결국 다 제 부족함 때문”이라고 말했다. 끝내 남 탓으로 돌리지 않는 태도는 오히려 그의 인간적 품격을 드러냈다.

 

냉정히 돌아보면 통일그룹의 스포츠 투자가 한국 사회에 남긴 공헌은 결코 작지 않았다. 성남일화가 국제무대에서 실력과 흥행, 선수 육성 측면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며 한국 축구 발전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피스컵과 피스퀸컵 같은 국제대회를 통해 스포츠 외교와 세계 평화라는 가치를 일찍부터 모색했다. 무엇보다 박규남은 스포츠의 공공성과 보편성을 철저히 지켜냈다. 선수단 구성에서 종교색을 배제했고, 타 종교 선수들의 기도 세리머니도 자연스럽게 존중했다. 이는 스포츠가 특정 종교의 도구가 아니라 사회를 잇는 공적 공간이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을 보여준다. 한국 현대사에서 종교는 예배당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병원과 학교, 복지와 스포츠를 통해 사회 곳곳에 참여해 왔다. 박규남의 삶 역시 종교가 사회와 만나 공적 역할을 수행할 때 어떤 긍정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2013년 시민구단 전환 논의가 이어지던 시기, 그의 마지막 바람도 거창하지 않았다. 그는 “제발 성남이라는 이름만이라도 남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팀의 역사와 연고지의 상징만은 지켜지길 바랐던 것이다. 그 말에는 성적과 우승을 넘어, 자신이 평생 품어온 축구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수개월 전에도 노구의 몸으로 신앙 공동체의 아픔이 있는 서울구치소를 찾았던 모습을 기억한다. 끝까지 신앙의 어머니와 공동체를 향한 마음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프로축구의 역사 속에는 지금도 운동장을 일곱 바퀴 돌며 선수들의 이름을 불러주던 한 노인의 기도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