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철의 여왕’ 대처 총리가 집권하던 영국. 정부는 석탄 산업에 사망선고를 내리고 광부들은 총파업으로 저항한다. 북부 탄광촌 소년 빌리는 마을회관에서 우연히 발레를 만나 천부적 재능을 드러내지만 가족은 소년의 춤을 이해 못 한다. 빌리는 아버지의 반대와 무너져 가는 공동체의 운명에 맞서며 자신의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가 돌아왔다. 2000년 개봉 영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이다. 영화를 만든 스티븐 달드리에게 작곡가 엘튼 존이 무대화를 제안하면서 작업이 시작됐다. 2005년 런던 초연 후 올리비에상과 토니상을 휩쓸었다. 한국은 2010년 비영어권 최초로 무대에 올린 뒤, 이번이 네 번째 시즌이다.
◆“빌리? 마라톤 뛰면서 햄릿을 연기하는 격”
빌리를 다시 만난 감상은 ‘경이롭다’로 압축된다. 열한살 소년이 두시간사십분짜리 대극장 뮤지컬 주역으로서 온전히 제 몫을 하는 무대를 바라보면 자연스레 생겨나는 감동이다. 역경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연기를 노래·고난도 춤과 함께 펼쳐 보인다. 빌리뿐 아니라 무대를 채우는 또래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다. 어린아이가 주인공인 영화는 흔하나 (어린이극을 제외한) 무대 공연 주역인 경우는 드물다. 얼마나 많은 분·초가 쌓여야 가능한 일인지, 제작진은 어떠한 노력을 했을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제작사 자료에 따르면 오디션으로 선발한 아역배우들은 420일에 걸쳐서 발레와 탭, 재즈, 아크로바틱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루 평균 6시간씩 배웠다. 80페이지에 이르는 대본과 가사를 외우고, 격한 안무 뒤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호흡법을 몸에 익혔다. 거의 1년 반에 걸친 사전 작업과 연습 끝에 만들어진 무대인 셈이다. 발레 선생 미세스 윌킨슨 역을 최정원과 함께 맡은 배우 전수미는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이 프로덕션만의 엄청난 연습량과 열정에 정말 큰 감동을 받았다. 이렇게 오랜 기간을, 이렇게 많은 연습실을 빌려 가며 준비하는 프로덕션은 없을 것”이라고 자부했다.
올해 무대에는 ‘빌리 엘리어트’를 만든 연출가 스티븐 달드리도 방한, 개막 공연에서 고사를 지내며 행운을 기원했다. 그는 한국 취재진을 만나 빌리라는 역할을 두고 “마라톤을 뛰면서 햄릿을 연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27일 공연에서 빌리를 맡은 김우진 역시 자기 역할을 120% 소화했다. 탭댄스와 발레, 노래를 모두 높은 수준으로 해내면서 거의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 공연 전체를 끌고 갔다.
특히 김우진이 성인 빌리로 출연한 발레리노 임선우와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은 특별한 감동을 줬다. 임선우는 1대 빌리 출신으로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로 성장해서 한국발레협회상에서 최우수상까지 받았다. 십수 년 세월을 건너뛴 두 빌리의 파드되는 영화와 현실이 한순간에 만나는 특별한 순간이었다.
백조의 호수가 흐르는 둘의 춤은 절정부에 이르면 빌리가 한 가닥 와이어에 의지해 공중에서 춤을 춘다. 무용을 중력에서 풀어 놓는, 어느 무대에서도 보기 힘든 고난이도 장면이다. 몸이 가벼운 아이이기에 가능한 춤이다. 빌리가 면접장에서 추는 ‘일렉트리시티’ 춤 역시 영화보다 더한 감동을 준다. 재능을 온몸으로 표출하며, 무용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말이 아닌 몸으로 보여준다.
◆빌리의 가족과 친구, 선생님
‘빌리 엘리어트’무대에서 최고 명장면은 ‘앵그리 댄스’다. 자신을 억압하는 환경에 분노한 빌리가 침실에서 시작해, 거리로 나와 경찰의 방패에 온몸으로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분노와 열정이 객석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뮤지컬이 영화를 압도하는 순간이다. 아이의 좌절과 시대의 폭력이 작은 몸에서 춤으로 터져 나온다.
어른 배역 중에선 마을회관 발레 선생 미세스 윌킨슨 역할이 크다. ‘제대로 된 어른’으로서 빌리의 재능을 발견하고 천재 소년의 영감을 끌어낸다. 이날 공연에선 한국 뮤지컬 1세대 스타로서 최정원이 진심어린 연기를 보여줬다.
뮤지컬에선 왠지 아빠, 할머니, 형과 빌리의 감정선은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는데, 이 빈 곳을 최정원과 단짝 마이클이 채워준다. 마이클을 맡은 이루리의 천연덕스러운 연기 또한 인상적이었다.
무결점에 가까운 공연이었지만 딱 하나 눈에 걸린 대목은 아빠 앞에서 빌리가 춤을 추며 자신을 표현하는 장면이다. 아들의 춤을 본 아버지 마음의 변화는 생략된 채 바쁘게 다음 장면으로 전환돼 아쉽다. 중요한 전환점인 만큼 그 감정의 도약이 조금 더 설득력 있게 쌓였다면 하는 바람이 남는다.
◆변함없는 연대의 가치
5년만에 다시 만난 ‘빌리 엘리어트’에선 ‘연대’라는 주제가 새롭다. 파업 광부들의 이야기는 영화보다 더 심각하고 묵직하게 다뤄진다. ‘더 스타즈 룩 다운’, ‘원스 위 워 킹’처럼 극을 여닫는 합창곡 모두 “어둠 속 폭풍에도 서로 어깨를 맞대고 이겨내리”라며 연대를 강조한다. 엘튼 존이 만든 노래인데도 마치 국내 시위 현장에 울려 퍼졌던 저항가요를 생각나게 한다.
빌리가 마을을 떠나는 마지막에 광부들이 부르는 ‘원스 위 워 킹’은 “한때 우리는 영웅이었고, 왕이었노라”며 무너져 가는 공동체의 자긍심과 비애를 동시에 끌어안는다. 패배가 확실해진 순간에도 그들은 “그래도 우리는 당당히, 함께 걸어가리”라고 노래한다. 팝스타가 만들어낸 이토록 묵직한 합창이 ‘연대’라는 가치를 영국인들이 얼마나 가슴 깊이 새기고 있는지 방증한다.
그만큼 이 작품에 내재된 대처를 향한 비난은 신랄하다. 달드리는 한국 기자들에게 2013년 대처 사망 당시 런던 웨스트엔드 공연에서 대처를 조롱하는 장면을 빼야 할 지 고민했던 일화를 말해줬을 정도다. 결국 2막 오프닝 곡 ‘메리 크리스마스, 매기 대처’를 그날 무대에 올릴지 말지 관객 투표에 부쳤고, 1500여 객석 중 단 세 명만이 반대해 노래는 예정대로 불렀다고 한다.
이번 방한 간담회에서 달드리는 그 분노의 뿌리가 자신의 개인사와 맞닿아 있음을 털어놓았다. “젊은 연출가였던 1984년에 받은 첫 유급 일이, 사우스요크셔 탄전에서 급식소를 운영하던 여성들에 관한 작품을 연출하는 것이었습니다. 파업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여러 광부 복지회관을 돌며 그 공연을 순회했죠. 제 성인기의 큰 부분이 그런 광산 마을들에 깊이 관여해온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건 제게 아주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그는 무대가 영화보다 공동체의 이야기를 더 잘 전달한다고도 믿는다. “우리는 빌리 한 사람이나 그 가족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무대 버전이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영화보다 더 성공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처 시대 이후 영국 제조업은 종말을 고했는데 달드리는 인공지능(AI)혁명 역시 비슷한 파고(波高)를 일으킬 것으로 내다본다. “앞으로 5년 안에 세상은 급격히 바뀔 것입니다. 큰 승자도, 큰 패자도 생기겠죠. 1984년 영국이 제조업을 버렸고 광부들이 그 과정의 일부가 되었듯, 지금 여러 산업에서 일자리가 놀라운 속도로 사라질 겁니다. 일에 헌신했던 공동체들이 무시당하고 잊혔지는 것, 그것이 실제로 벌어질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작품의 결말을 ‘달콤씁쓸’하다고 표현한다. 소년은 런던으로,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기회를 얻지만 그를 키운 공동체는 무너져 간다. 마지막에 광부들이 광산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한 산업과 한 삶의 방식에 바치는 애가(哀歌)다. 과거를 뒤로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는 젊은 세대, 그리고 그들을 키워 세상으로 내보내야 하는 기성세대의 역할이 교차한다. 그것이 지금 필요한 연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