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메뉴 보기 검색

6월의 6·25 전쟁 영웅 밴플리트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입력 :
폰트 크게 폰트 작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육군참모총장은 조지 마셜 원수였다. 유럽이든 태평양이든 모든 전선에서 뛰는 고위 장교들은 마셜의 ‘오케이’가 있어야만 진급할 수 있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보병연대를 지휘한 제임스 밴플리트 연대장은 그때 계급이 대령이었다. 1915년 밴플리트와 함께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이들 중에선 이미 4성장군이 배출됐다. 심지어 후배 기수가 사단장(소장)을 맡고 있기도 했다. 하루는 밴플리트의 육사 동기생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장이 마셜에게 밴플리트는 왜 진급이 안 되는지 물었다. 마셜은 “술주정정뱅이라서 그렇다”고 답했다. 마셜은 밴플리트와 이름이 비슷한 다른 말썽쟁이 장교를 밴플리트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육사 교정에 세워진 제임스 밴플리트(1892∼1992) 미 육군 대장의 동상(왼쪽 사진). 오른쪽은 오산공군기지 안에 있는 아들 제임스 밴플리트 주니어(1925∼1952) 미 공군 대위의 흉상. 세계일보 자료사진
한국 육사 교정에 세워진 제임스 밴플리트(1892∼1992) 미 육군 대장의 동상(왼쪽 사진). 오른쪽은 오산공군기지 안에 있는 아들 제임스 밴플리트 주니어(1925∼1952) 미 공군 대위의 흉상. 세계일보 자료사진

오해를 푼 밴플리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 직후인 1944년 8월 준장으로 진급했다. 동기생들보다 한참 늦게 별을 달았지만 곧 전투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순식간에 소장으로 올라선 밴플리트는 사단장으로서 잔존한 독일 육군 분쇄에 앞장섰다. 전후인 1946년 그리스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내전을 일으켰다. 미국 행정부는 이듬해 밴플리트를 단장으로 하는 군사 고문단을 그리스에 보내 정부군을 돕도록 했다. 이 기간 밴플리트는 중장으로 진급했고, 그리스의 공산화는 결국 저지됐다. 공산주의와의 대결은 밴플리트에겐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밴플리트는 미 육군 제8군 사령관에 임명돼 한국에 부임했다. 같은 해 4성장군에 오른 그는 1953년 1월까지 8군을 지휘하며 압도적 숫자의 중공군 남하를 끝내 막아냈다. 아들이자 공군 조종사인 제임스 밴플리트 주니어 대위도 한국에 파병돼 아버지와 함께 싸웠다. 그런데 1952년 4월4일 폭격기를 몰고 북한 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밴플리트 주니어가 적의 대공포 공격에 맞아 추락해 실종되는 비극이 벌어졌다. 부하들이 수색 작전에 나섰으나 밴플리트는 “내 자식 찾는 일로 다른 장병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해서는 안된다”며 이를 중단시켰다. 그는 정전협정 체결을 4개월가량 앞둔 1953년 3월 명예롭게 전역했다.

 

6·25 전쟁 당시 미 육군 제8군을 지휘한 제임스 밴플리트 대장이 전쟁 고아로 추정되는 한국 어린이를 업고 있다. SNS 캡처
6·25 전쟁 당시 미 육군 제8군을 지휘한 제임스 밴플리트 대장이 전쟁 고아로 추정되는 한국 어린이를 업고 있다. SNS 캡처

국가보훈부가 ‘이달(6월)의 6·25 전쟁 영웅’으로 밴플리트 부자(父子)를 선정했다. 6월이 ‘호국보훈의 달’이란 점에서 참으로 뜻깊다. 밴플리트는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한국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특히 6·25 초반 국군이 북한군에 연전연패한 것이 지휘관 등 장교들의 부족한 자질 탓이라고 여긴 그는 육사 발전에 온 힘을 쏟았다. 오늘날 서울 노원구에 있는 육사 교정 안에 밴플리트의 동상이 세워진 것은 그 때문이다. 70세이던 1962년 그는 연설 도중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아름다운 산천, 아이들의 쾌활한 목소리와 웃음을 나는 잊지 못한다. 한국에서는 고향과 같은 따뜻함과 편안함이 있다. 한국은 내 고향이자 집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