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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민(愛民)’과 ‘포퓰리즘’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 [조선생활실록(實LOG) 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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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관오리 이미지의 조선 수령
백성들을 위한 방파제 역할도
자칫 명예 탐한 ‘要譽’로 오해
예산현감, 흉년 피해 심각하자
상부의 피해 축소 압박에 맞서
6·3선거 후보자들도 되새겨야

“조정의 기준과 다르다고 하여, 제가 어찌 흉년을 핑계로 사사로운 명예나 탐하는 허위 보고를 감히 하겠습니까?” 『오산문첩(烏山文牒)』 (1760년 10월)

 

지방선거를 앞둔 요즘, 거리를 가득 채운 기초단체장 후보들의 화려한 공약을 바라보며 유권자들은 의문을 품는다. 공약이 지역발전과 주민을 위한 철학에서 나왔는지, 유권자의 환심만 사려는 수단에 그칠지 말이다.

 

1758년(영조 34년)부터 1763년까지 충청도 예산현에서 감영 등 상급 기관에 올린 보고서와 전령 내용을 정리하여 엮은 오산문첩. 오산현감 한경의 보고서가 이 책에 수록되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1758년(영조 34년)부터 1763년까지 충청도 예산현에서 감영 등 상급 기관에 올린 보고서와 전령 내용을 정리하여 엮은 오산문첩. 오산현감 한경의 보고서가 이 책에 수록되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도 수령의 정치를 두고 백성을 아끼는 ‘애민(愛民)’의 길인지, 아니면 명예와 칭송만 바라는 ‘요예(要譽)’의 눈속임인지 갑론을박이 있었다.

 

수령이 있던 관아는 해당 지역의 진산(鎭山·지역을 수호하는 것으로 간주된 산)이나 주산(主山)을 배후로 두고 건축되었다. 배후의 산을 매개로 한 배경은 관아를 방문하는 백성에게 시각적 위엄을 느끼게 했다. 또 관아의 내부는 홍살문에서 시작해 세 개의 문을 거쳐야 수령의 집무처인 ‘동헌’에 닿을 수 있었다. 스마트폰의 3단계 보안 인증을 거치듯 삼엄한 세 개의 문을 통과한 다음에야 비로소 집무처가 나왔던 것이다.

 

수령은 이 위엄 가득한 공간에서 백성을 쥐어짜기만 했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아니었다. 오히려 수령은 중앙정부의 무리한 부세 요구와 현실을 무시한 지시 속에서 백성 부담을 덜어주는 ‘방파제’를 자처했다.

 

 

조선후기 수령의 행정 기록을 분석해 보면, 상급 기관과의 치열한 교섭 과정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대표적 사례로 1760년 10월, 충청도 예산현감으로 있던 한경(韓警)의 조처를 들 수 있다. 한경은 심한 흉년으로 농사를 망친 현장을 돌아보고, 보고 기한을 넘기면서까지 보고서 작성에 신중을 기했다. 그러나 관찰사는 조정에서 지시한 세금 수량을 맞추기 위해, 한경이 작성한 보고서가 과장되었다며 피해 규모를 축소하라고 압박했다. 아울러 보고서의 저의가 백성의 환심과 사사로운 명예를 구하는 요예에 있는 것이냐며 강하게 추궁했다. 조정과 상급기관에서 정한 ‘예산 수치’와 흉년을 당한 고을의 현실 사이에서 치열한 ‘밀당’이 벌어진 것이다. 피해 규모를 줄일 수 없다고 판단한 한경은 관찰사의 억측에 맞서, “요예는 바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백성이 죽고 사는 것은 오직 재해 입은 토지를 잘 검토하는 일에 달렸고, 이는 또한 오직 감사께 달렸습니다. 감사께서는 참작하여 행해 주십시오.”라고 보고했다.

 

영조 연간 충청도 예산현의 연혁과 지리 정보를 정리한 지리지인 예산현읍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영조 연간 충청도 예산현의 연혁과 지리 정보를 정리한 지리지인 예산현읍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예산현읍지 소재 예산현 지도.  예산현은 현재의 행정구역상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대술면, 오가면, 신암면 일대에 해당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예산현읍지 소재 예산현 지도.  예산현은 현재의 행정구역상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대술면, 오가면, 신암면 일대에 해당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은 다각도의 지방행정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수령의 지방행정은 제도에 기반한 ‘법치(法治)’를 바탕으로 삼되, 백성을 덕으로써 다스리는 ‘예치(禮治)’를 이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법치만 내세우면 행정은 차가워졌고, 예치만 지향하면 백성의 기강은 느슨해졌다.

 

한경과 같은 지방수령은 법치와 예치를 오가며 상급 기관과 끊임없이 교섭을 벌였다. 조정에서 지방 현실과 괴리된 지시가 내려오면 재량권을 적극적으로 발휘해 백성의 부담을 낮추거나 최소한 납부시기라도 조율했다. 예산현감 한경의 분투는 ‘법치’와 ‘예치’의 틈새를 ‘인치’로 메우며 고을의 방파제가 되었던 유의미한 사례라고 하겠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 풍속화가인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첩에 담긴 법정변송으로, 당시 관아에서 진행된 법정 소송 장면을 그린 것이다. 신분이 다를 것으로 추정되는 두 사람이 수령 앞에서 소송 관련 주장을 펼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 풍속화가인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첩에 담긴 법정변송으로, 당시 관아에서 진행된 법정 소송 장면을 그린 것이다. 신분이 다를 것으로 추정되는 두 사람이 수령 앞에서 소송 관련 주장을 펼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물론 인치에 기반한 행정은 양날의 검이었다. 수령이 고을의 형편을 고려해 조세 부담을 줄여주거나 중앙의 지침을 융통성 있게 조율하면, 백성에게 “우리 고을 수령이 최고”라는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조정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았다. 나라와 백성이 아닌, 자기 고을만 염두에 두고 한때의 명예를 구하는 ‘요예(要譽)’로 비췄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영남 지방 고기잡이배의 현황을 파악하고 정정하여 세금을 매긴 수세 문서로, 백성이 소유한 배와 고기잡이 어구의 크기에 따라 세금을 부여하고 거둔 사실이 기록도어 있다. 국립한글박물관
조선후기 영남 지방 고기잡이배의 현황을 파악하고 정정하여 세금을 매긴 수세 문서로, 백성이 소유한 배와 고기잡이 어구의 크기에 따라 세금을 부여하고 거둔 사실이 기록도어 있다. 국립한글박물관

수령은 요예라는 비판을 피하면서도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본분과 책임을 다해야 하는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국가ㆍ조정’과 ‘고을ㆍ백성’이라는 두 축 사이에서, ‘요예’와 ‘애민’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타는 ‘외줄타기’였다. 또 그것은 법치와 예치 그리고 인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지방 수령들의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지방선거를 앞둔 지금 우리 앞에 선 후보들의 수많은 약속은 진정 지역을 품으려는 ‘애민’의 발로인가, 아니면 표심을 잡기 위한 ‘요예’의 덫인가. 조선의 지방 수령이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은 오늘날 후보자와 유권자 모두에게 여전히 유효하다.(한국국학진흥원 전통생활사총서 42)

 

원재영 연세대 미래컴퍼스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