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에게 낙선은 엄청난 상실감을 안겨준다. 술자리에서 만난 전직 의원은 그 경험을 죽음을 받아들이는 심리 변화 과정인 ‘퀴블러 로스 모델’에 빗대어 설명했다.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5단계를 거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개표가 잘못됐다고 믿었고, 당 지도부의 정치력과 공천 과정의 문제였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고 했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자신의 패인과 그간의 정치생활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정치에 대한 무력감으로 방황하다가 다시 정치인 이전의 일상을 회복하는 데까지는 수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 회복의 과정은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에도 적용된다.
대한민국 정치권은 언제부턴가 현실을 수용하는 마지막 단계를 잃어버린 듯하다. 패배의 원인을 준엄한 민심과 스스로의 무능에서 찾지 않고, 상대의 마타도어와 이를 그대로 믿는 대중의 무지로 몰아가는 행태가 고착화됐다.
유튜브를 비롯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선거 때마다 이런 불신의 정치에 기름을 붓는 ‘음모론 비즈니스’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극적으로 ‘부정 선거’ 논란을 제기해 조회 수를 올리고, 팬덤을 결집하기 위해 ‘불복 정치’를 부추긴다. 확증편향에 갇힌 지지층이 가짜뉴스를 소비하는 동안 음모론자들은 경제적 이득을 취한다. 이 와중에 정치인들은 다시 이들의 표를 얻기 위해 불신의 정치판에 뛰어드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유권자가 선거에 참여하고, 투표 결과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대의민주주의의 근간이다. 승패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타협과 상생의 무대가 될 수 없다. 나와 뜻이 맞지 않는 상대를 전멸시켜야 끝나는 전쟁터가 되는 셈이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광범위한 불신은 경쟁 자체의 의미를 축소시킨다.
최근 초등학교에서는 운동회에서 순위를 매기는 달리기 시합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1등부터 꼴찌까지 줄을 세우는 대신 모두 손을 잡고 결승선을 통과하거나 아예 승패가 없는 종목 위주로 대체한다고 한다. 학생들이 좌절감을 느낄 수 있다는 이유로 학업 성취도를 평가하는 시험도 과거보다 확연히 줄어들었다. 극한 대립을 차단하기 위해 애초에 경쟁과 갈등을 원천 차단해 주려는 배려에는 공감하지만, 민주주의 측면에선 안타까운 대목이다. 승자가 인정받고 패자가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과정이 생략된 무균실 같은 환경을 만들어 주겠다는 온정주의적 처방이 될 수 있어서다. 승자는 자신도 패배할 수 있다는 겸허한 타협의 자세를 배우고, 패자는 부족한 점을 깨닫고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한 성장통의 기회로 삼는다. 우리 교육과 사회 시스템은 그 과정에서 단 한 번의 패배가 부끄러운 낙인에 머무르지 않고 공정한 다음 기회를 보장한다는 신뢰를 심어줘야 한다.
6·3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는 총 7829명이 후보로 등록했다. 4241명의 당선자는 지역과 주민을 위해 일할 기회를 얻게 되지만, 나머지 3000여명은 낙선의 아픔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이들이 유권자의 심판을 겸허히 수용하고, 패배를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을 수 있기를 응원한다.
술자리에서 만났던 낙선 정치인은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는 컨설팅과 강연으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의 직업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했다.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자존심을 굽히는 굴복이 아니라 정치를 배워 가는 성숙함이다.” 정치에 도전하는 후배들에게 꼭 전해 준다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