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양이 바라보이는 미국 뉴욕 주 롱아일랜드 동쪽 바닷가, 검은 머리를 한 일군의 여행객들이 나타났다. 가벼운 복장을 한 이들은 동쪽 끝에 위치한 몬탁 등대 주위를 서성거렸다. 몬탁 등대는 뉴욕 주에서 처음 만들어진 등대였고, 미국에서도 4번째로 오래된 등대. 근처의 빈곤한 한촌에서 자란 월트 위트먼 역시 시집 『풀잎』으로 미국 국민시인이 되기 전인 어린 시절 이곳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나를 찬양하고 나를 노래하노라./ 내가 취하는 바는 그대로 취하리라,/ 내게 속한 모든 원자는 그대에게 속한다고 할 수 있으니,/ 나는 빈둥거리며 내 영혼을 부른다,/ 나는 몸을 기대 편한 마음으로 천천히 한 줄기 여름풀을 살펴본다.”(휘트먼의 장편시 「나 자신의 노래」 부문)
2016년 5월 말, 여행객들은 몬탁 등대에서 대서양을 바라보기도 했고, 목탁 등대와 대서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으며, 휘트먼의 삶과 문학을 이야기하거나 이렇게 그의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이들 여행객들은 바로 평론가 임헌영이 이끌던 세계문학 기행팀이었다. 이들은 대서양 바다를 바라보며 한동안 떠나지 않으려 했다. 풍광도 풍광이었지만, 휘트먼의 어릴 때 빈한한 모습과 그의 문학적 근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전공이 한국문학으로 국내 문학기행은 이미 대부분 다녀왔던 임헌영이 세계 문학기행을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 그는 한 나라를 2주씩 잡아 매년 2회 이상 세계문학기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대학뿐만 아니라 지자체나 백화점의 교육문화센터 등에서 시민을 상대로 세계문학기행 강의를 해왔던 그였다.
이 나라에 가면 무엇이 제일 유명한가, 저 지역에선 무슨 술이 유명한가, 식당은 뭐가 유명한가, 그 지역을 배경으로 한 노래나 영화는 무엇이 있느냐.... 사전 준비와 공부를 위해 신청자들에겐 세계문학 강의를 듣도록 했고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실제적인 과제를 내주었다. 그 역시 세계문학기행 전집 등 관련 자료를 사전에 조사하고 공부했다.
코스는 여행사에 맡기지 않고 그가 직접 정했다. 반드시 가야할 곳, 코스와 일정 등을 일일이 다 정했다. 미국 같은 나라는 영토도 방대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영향력도 지대해 2주론 턱도 없었다. 동북, 중부, 서부 이런 식으로 나누어 세 차례를 가야 했다.
코스와 일정을 잡아서 단골 여행사에 맡겼다. 여행사에선 “가이드도 가본 적이 없다”며 처음엔 난색을 표했지만, 꼼꼼하고 알찬 기행이라는 입소문이 나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나중에는 특화하자는 말까지 나왔다.
단순히 문학기행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역사와 인물, 사상과 제도는 물론, 선거제도나 세금이나 복지까지 구체적으로 두루 살피려 했다. 여행지와 관련한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기도 했고, 때론 그가 직접 역사와 문학, 인물에 대한 설명을 하기도 했다. 현지 가이드도 외지인들이 모르는 교육이나 의료, 복지, 세금 제도 등을 세세하게 들려줬다.
“대문만 나서면, 그래서 국경만 넘으면, 지상의 모든 업으로 짓누르던 저 시시포스의 바위를 굴러버리고서 바람이나 구름처럼 해방된 절대 자유인 조르바가 된다. 나그네의 눈에는 세상 온갖 번뇌와 잡사, 심지어는 가난과 남루조차도 그저 로맨틱하게 보인다. 용서와 관용과 여유가 이토록 쉽게 실현될 수 있다니! 이 지상을 유토피아로 만들 수 있는 가장 빠른 비결은 남의 나라 여행객이 되는 것이다.”(『유럽문학기행』, 8쪽)
처음부터 책으로 펴낼 것을 염두에 두고 시작했지만, 강의 자료도 있었고 사진도 컴퓨터에 다 저장돼 있었지만, 책으로 출간하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게다가 문단 활동에, 역사문제연구소와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던 터라 시간도 녹록치 않았다. 세계문학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해와, 해당 국가와 지역에 대한 여행 경험, 이것을 다시 말과 글로 풀어쓸 수 있는 내공까지 두루 있어야 가능한 어려운 작업이기도 했다.
마침 주간지 『한겨레 21』에 연재를 하게 되면서 초고를 쓸 수 있었고, 이어서 역사비평사의 출간 제의가 뒤따르면서 책을 펴낼 기회를 잡았다. 톨스토이와 빅토르 위고, 괴테 등 유럽과 러시아의 대가급 문인 10명만 골라 먼저 『유럽역사기행』을 2019년 출간했다.
원로 문학평론가이자 신임 국립한국문학관장인 임헌영이 이번에는 미국의 대표 작가 삶과 작품, 역사 현장 탐방을 기록한 『임헌영의 미국문학기행』(역사비평사)을 들고 돌아왔다. 『유럽문학기행』을 출간한 지 7년 만이다.
이번 미국문학기행에서 다룬 작가는 벤저민 프랭클린을 시작으로 미국의 지적 독립을 강조한 랠프 에머슨, 생태 및 평화사상을 드높인 헨리 소로, 국민시인 월터 휘트먼, 허먼 멜빌, 헤밍웨이 등 모두 15명. 게다가 이전과 달리 작가의 삶과 문학을 넘어 역사 현장과 인물 탐방을 통해 미국 역사를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원로 문학평론가 임헌영은 왜 미국문학기행을 써야만 했을까. 그가 본 미국 문학과 역사는 어떤 모습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와 인생 여로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임 평론가를 지난 14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세계문학기행서를 쓰는 데 무엇이 가장 어려웠는지.
“무엇보다 쉽게 쓰는 게 어려웠다. 조사하고 탐방한 것을 다 쓰면 지금 분량보다 5배나 10배쯤 될 텐데, 책 분량으로 줄이고 빼고 압축하는 게 힘들었다. 아까운 것이 있으면 뺐다가 넣고 다시 또 빼기도 했다.”
―이번 『미국문학기행』에서 만난 가장 인상적인 장소나 인물을 꼽는다면.
“헤밍웨이를 비롯해 많은 작가들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헨리 소로의 책 『윌든』의 무대가 된 (매사추세츠주 콩코드 지역의) 윌든 호숫가였다. 2010년대 초, 소로가 숲속 체험을 한 콩코드에 갔었는데, 그가 생활한 곳을 보니 저도 살고 싶더라. 미국은 총기를 소지한 잔인한 특성이 있는 반면, 전쟁과 평화도 동시에 공존한다. 소로는 생전 미국의 멕시코전쟁이 영토확장을 위한 침략전쟁이었다고 반대했고, 『시민 불복종』을 써서 평화 사상을 설파하기도 했다. 소로 같은 사상가가 있었기에, 미국이 비록 제국주의가 아닌 게 아니지만, 인자하고 인도주의적인 측면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톨스토이나 간디도 나중에 소로와 그의 사상을 알게 되면서 반전 평화를 주장했다.”
―국내 독자들에게 특별히 소개해주고 싶은 작가가 있는지.
“소설 『대지』로 널리 알려진 노벨문학상 수상자 펄벅인데, 펄벅은 세계 모든 작가 중에서 한국을 가장 사랑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의 살아있는 이야기나 갈등 등을 많이 썼고, 국내 일부 독자도 굉장히 애독을 했다. 뒤늦게라도 훈장을 달아줘야 할 작가다. 경기도 부평에 펄벅재단이 있는데, 일부러 두 번이나 찾아가 봤다.”
―단순한 문학기행만이 아닌 미국의 역사 전반을 다룬 게 인상적이다.
“국내에 소개된 미국사가 굉장히 많지만, 한미관계의 역사나 문제가 제대로 다뤄진 것은 거의 없다. 실제 많은 한국인들은 미국 역사뿐만 아니라 한미관계를 잘 모른다. 한국이 미국에 많은 신세를 지고 있는 줄 아는데, 웃기는 소리다. 조선은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서로 돕기로 약속했는데, 미국은 나중에 가스라-태프트 밀약 등으로 조약을 위반했다. 밀약은 필리핀 지배를 위해 일본의 조선 병합을 양해한 일종의 허가장으로, 우리나라에게 큰 잘못을 한 것이다. 일본은 이후 밀약을 체결한 태프트가 미 대통령이 되자 마음 놓고 조선을 병합했다. 양심이나 민족의식을 가진 역사학자라면 이 문제를 분명히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가스라-태프트 밀약 등 미국의 역할을 이 책에선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이번 책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미국문학기행』의 경우 문학인과 문학작품에 한정하지 않고 조지 워싱턴, 링컨, 루스벨트 등 정치인과, 카네기와 록펠러 등 기업인, 마틴 루서 킹 등 사회운동가도 다룬 것이 특징이다. 특히 재벌인 카네기가 미국 정부의 침략 정책을 반대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미국이 필리핀을 침략할 때 마크 트웨인과 함께 전쟁을 반대하는 조직의 부회장을 맡았다. 톨스토이도 러일전쟁을 반대했고, 그의 평화사상이 일본에 가서 백화파가 돼 일제의 조선 침략을 반대했다.”
우리는 왜 서로를 죽고 죽이고 미워해야 하는가. 우리 역사는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어머니부터 누나까지 집안 여성들은 저녁만 되면 마치 초상집처럼 눈물을 쏟았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많은 집안 남자들이 죽거나 월북하는 등 비극이 이어진 탓이다. 아버지와 형제들은 대구 10월 항쟁에 연루됐다가 목숨을 건지는 듯 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됐다. 형은 또 아버지를 찾으려고 숨어 지내다가 퇴각하는 인민군에 붙잡혀 목숨을 잃었다. 한국전쟁은 완전히 과부 집안으로 만들었다.
초등학교 4학년생 임헌영은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대신 알 수 없는 질문이 그를 강렬하게 휘감았다. 우리 집안은 또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왜 남과 북은 서로 갈등하고 싸워야 하는가. ‘문학평론가 임헌영’의 첫 씨앗이 뿌려지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중학생이 되자 국사를 비롯해 역사를 배우기 시작했다. 잘 사는 친구의 집에 가서 책을 빌려 읽기도 했다. 길거리에 떨어진 신문을 보거나 주위의 이야기를 들으며 차츰 역사를 알게 됐다.
졸업 후 곧바로 교사로 취직하는 안동사범학교로 진학했다. 교과는 영어나 수학보다 국어를 더 중시했고, 교육 철학이나 아동 심리 등도 배워야 했으며, 무용은 물론 음악이나 풍금도 익혀야 했다. 입시공부 부담이 없어 도서관에 가서 문학책을 비롯해 많을 책을 읽었다. 『사상계』를 비롯해 월간지도 봤다. 문예반에도 가입했다. 시를 처음 써보기도 했다. 친구들보다 더 잘 쓰지 못해 때려 치웠지만.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모교 교사가 된 그는 1960년 3.15부정선거와 4.19혁명을 겪자 교직을 2년 만에 그만 두고 다시 대학입시를 치러 중앙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그 사이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박완서의 단편 「나목」의 주인공 같은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대학 1학년 시절, 그는 당시 화제를 모았던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집안의 불행과 이명준의 불행이 겹쳐보였기 때문이다. 독후감 식으로 최인훈의 광장론을 정리해 대학 잡지에 투고해 실렸다. 대학 신문사에서 문화담당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1년 의성에 나고 자란 임헌영은 대학원 재학시절인 1966년 「장용학론」을 『현대문학』에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한국현대문학사상사』,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 『임헌영의 유럽문학기행』, 『임헌영의 미국문학기행』 등을 출간했다. 임화문학예술상,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와 함께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월간 『다리』와 월간 『독서』, 『한길문학』, 『한국문학평론』 등의 잡지에서 편집주간으로 일했고, 참여사회아카데미 원장과 민족문제연구소장 등도 역임했다. 1974년 문인 간첩단사건과 1979년 남민전 사건 등에 연루돼 징역을 살기도. 지금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평론을 비롯해 글을 쓸 때 원칙이나 방법이 있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문학이라도 작품을 창조할 때까지 작가는 현실적인 땅을 딛고 산다. 저는 작품뿐만 아니라 작가가 어떻게 살았느냐를 굉장히 중요시한다. 일종의 환경 중시론이나 역사적 배경 중시론이라 할 수 있다. 작품만이 아닌 작가 전체를 보고 평가하는 역사적 비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올해 1월 신임 국립한국문학관장에 취임하셨는데, 포부나 계획이 어떤가.
“첫째, 모든 문학인들이 ‘촌수’가 생기게 하고 싶다. 세계의 박물관에 가면 대개 잘나가는 문인들만 전시해 놓고 있는데, 유명 문인은 있을 수 있어도 자격 없는 문인은 없다. 모든 문학인은 문학 앞에서 평등하다. 그래서 다양한 인연이나 행사를 통해 모든 문인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인연을 맺도록 만들고 싶다. 다음으로, 문학 대중화를 통해 전 국민을 문학 애호가나 문학 지지자로 만들고 싶다. 또 한국문학과 연관된 해외 작가들, 한국문학 연구자들, 해외동포 작가들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싶다. 지금 세계 각국에 한국 문인들이 없는 곳은 없다. 이들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연대해야 한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 무대에서 한국문학의 약진도 두드러지고 있다.
“한 작가가 202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전율했다. 사람들은 노벨문학상을 받아서 한 작가가 위대하다고 평가하는데, 저는 거꾸로 본다. 노벨문학상을 받음으로 해서 한 작가가 유명해진 게 아니라, 반대로 노벨문학상이 한 작가의 수상으로 유명해진 것이다. 그 동안 노벨문학상은 공정하지 않았고 욕도 많이 얻어먹었다. 어느 순간부터 국내 출판계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번역도 하지 않게 됐고, 사람들도 읽지 않아왔다. 그런데 이번에 한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그동안 자신들이 엉터리로 한 게 어느 정도 합리화가 됐다. 한 작가와 한국문학이 이만큼 위대하다. 사회적 모순과 역사 문제에 맞서 한국 작가들처럼 치열하게 도전하며 글을 쓰는 사람들도 흔치 않다. 앞으로도 계속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AI) 시대, 문학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요즘 다들 AI, AI하는데, AI가 뭔가. 결국 문학적 인문학적 상상력 아닌가. 이제 AI나 과학적 혁신 모두 인문학적 베이스가 없으면 안된다. 기술로만 하면 막힌다. AI를 사람처럼 만들려면 문학적인 정서가 아니고 안 된다. 이런 점에서 한국문학관에서 할 일이 많다. 다만, 막상 제가 실무를 맡아 보니 예산이 제일 중요했다. 심지어 다른 부서, 부처 사람들까지 문학의 중요성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더라. 문학 예산이 충분하고 넉넉하게 지원돼야 한다.”
―세상을 사는 지혜, 인생의 전략이 특별히 있는지.
“제 주의는 항상 즐겁게 살자, 민주화 운동을 하더라도 즐겁게 하자, 이다. 일종의 낙관론이라 할 것이다. 회의를 해보면, 저는 남들이 잘 생각하지 않는 영역의 출구를 잘 찾는다. 철학자 가운데 헤겔을 좋아하고, 특히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좋아한다. 헤겔의 책을 읽고 느낀 것은, 위기일 때는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위기일 때 변칙을 써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러면 더 큰 재앙, 더 큰 패배, 더 큰 절망이 온다. 원칙을 지키면, 고생을 하더라도 결국 반드시 새로운 출구가 생기더라. 패배하더라도 원칙을 지킨 패배라면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문이 활짝 열린다.”
사람들은 만나면 서로의 족보를 따지거나 조상 자랑을 하곤 했다. 자랑할 조상이 별로 없던 그가 입을 연다. “조상이 내만큼 좋은 사람이 없을 기다. 왜냐. 내 윗대 어른 중에는 임마누엘 칸트가 있다.” 사람들은 웃고 족보 얘기는 그것으로 끝.
마치 임마누엘 칸트처럼, 임헌영은 절제하는 삶을 산다. 중학교 2학년 이래 지금까지 아무리 늦게 자더라도 새벽 4시에서 5시 사이면 어김없이 일어난다. 온수 한두 잔을 마신 뒤, 그날 할 일을 한 두 시간 안에 하거나 시간을 체크해 정리해 놓는다. 하루 일과의 차질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 대개 밤 10시 전에 취침.
그의 건강 비법은 징역살 때 독학으로 배운 단전이다. 아무리 바빠도 매일 한다. 여행하다가 감기 기운이 있으면 곧바로 단전을 하면 감기 기운이 오다가도 사라진다. 특유의 낙지 춤도 개발했다. 목욕을 한 뒤 온몸을 뒤틀고 낙지 춤을 춘다. 방법은 비밀.
컴퓨터에는 미국과 프랑스, 일본, 소련, 중국 등 다양한 노래 파일이 담겨 있다. 글을 쓰다가 막히면 음악을 듣는다. 일본 노래가 나오면 일본 여행지를 떠올리고, 러시아 노래가 나오면 볼가강에 갔던 때를 상상하며, 미국 노래가 나오면 매사추세츠 콩코드 근처 윌든 호수를.... 순간 매듭이 탁 풀리고 영감이 떠오르면, 노평론가 임헌영은 음악을 끄고 이야기와 글을 만나러 간다. 거기에서 1845년부터 2년 2개월간 콩코드 근처 윌든 호숫가에 앉아 있는 소로도....
“진실로 바라건대 당신 내부에 있는 신대륙과 신세계를 발견하는 콜럼버스가 되라. 그리하여 무역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상을 위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라. 각자는 하나의 왕국의 주인이며, 그에 비하면 러시아 황제의 대제국은 보잘것없는 작은 나라, 얼음에 의해 남겨진 풀 더미에 불과하다.”(『윌든』 중에서, 11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