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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리포트] 홍콩 우산혁명과 韓 투표지 부족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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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시민이 부러워한 韓 선거
지선 투표지 부족 파문에 얼룩
참정권 박탈 이어 음모론 부활
무능한 선관위, 전면 쇄신 필요

지난 3일 지방선거일 아침, 한 광둥어 언어교환 채팅방에 홍콩인 회원이 “한국 친구 여러분, 여러분의 투표권을 소중히 여기고 꼭 투표하러 가세요”라는 글을 올렸다. 이에 다른 이가 ‘진보선(眞普選·진정한 보통선거)’이라는 세 글자로 화답했다.

진보선은 2014년 중국 당국이 친중파 인물만 홍콩 행정장관 등의 후보로 등록할 수 있게 하자 홍콩 시민들이 ‘우산혁명’을 통해 “우리 손으로 직접 행정장관 후보를 뽑게 해달라”고 외친 구호였다. 당시 홍콩 시민들은 수십일간 거리에서 최루탄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투표다운 투표를 할 권리를 요구했다. 하지만 결국 2020년 홍콩 국가보안법이 전격 제정되고 선거 제도가 홍콩 행정장관과 입법회 의원 선거에서 친중 성향의 ‘애국자’만 출마할 수 있도록 바뀌면서 홍콩의 투표권과 민주주의 시스템은 사실상 완전히 무력화됐다. 이 같은 홍콩의 현재를 고려하면 그가 바다 건너 한국 유권자들에게 건넨 한 마디는 투표권이라는 권리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경고처럼 느껴졌다.

이우중 베이징 특파원
이우중 베이징 특파원

하지만 정작 ‘진보선’이 보장되는 한국에서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황당하고 심각한 사태가 발생했다. 일부 투표소에서 선거 당일 투표용지가 바닥나 유권자들이 한참을 대기하거나 투표를 포기하고 발길을 돌려야 하는 초유의 행정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단순한 유언비어인 줄만 알았다.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일이라 느꼈기 때문이다.

이는 선거관리의 기본 중의 기본인 유권자 수 산정과 그에 따른 용지 배부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만약 중국 당국이 과거 홍콩의 민주화 시위를 진압하고 통제하는 과정에서 물리적 폭력이나 법적 처벌이 아닌 “선거용지가 부족하다”는 행정적 핑계를 대며 투표권을 제한했다면, 오히려 기발한 탄압이라며 국제사회의 비웃음과 함께 시위대의 분노가 더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을 것이다. 중국 당국의 홍콩 통제가 입맛에 맞는 후보자만 나오도록 만든 치밀한 정치적 계산이었다면 이번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아예 유권자의 참정권 자체를 행정적 무능으로 차단해 버린 꼴이 아닌가. 민주주의 선진국을 자처하는 대한민국에서 국가 선거 사무를 총괄하는 기관의 안일함으로 인해 유권자의 기본권이 물리적으로 차단된 것은 행정 쇄신이나 선관위 해체 수준의 고강도 개혁 없이는 용납될 수 없는 사태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행정 착오’로 치부할 수 없는 상황으로,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선거와 보통선거의 가치를 국가 기관 스스로 훼손한 행위다. 특정 시간대에 투표소를 찾은 국민이 국가의 준비 부족으로 인해 대기 시간을 강요받거나 투표를 포기하게 만든 것은 사실상 국가에 의한 참정권 박탈과 다름없다. 정보기술(IT) 강국이자 세계에서 가장 촘촘한 행정 전산망을 자랑하는 한국에서 선거 당일 투표용지 수량조차 맞추지 못한 것은 시스템의 총체적 붕괴이자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수치스러운 기록이다.

더욱 심각한 사회적 부작용은 이번 사태가 우리 사회의 이성적 토대를 위협하는 극단적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에게 다시 한 번 호흡기를 달아주었다는 점이다. 선관위가 자초한 치명적인 행정 실패는 철저한 비판과 사법적 조사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이것이 그동안 음모론자들이 주장해 온 황당무계한 가짜뉴스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경찰복을 입고 시민을 탄압하는 세력이 사실은 중국인 아르바이트생이다”라거나 “중국 공산당이 중앙선관위 전산망을 해킹해 투표를 조작하고 있다”는 등의 선동과 이번 투표용지 배포 부실 사태는 전혀 별개의 사안이다. 그러나 선관위의 치명적인 무능은 결과적으로 이성적인 비판의 영역을 지워버리고, 온갖 불신과 가짜뉴스라는 괴물을 키우는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하며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가중시키고 있다. 홍콩인들이 한때 목숨을 걸었고, 지금은 부러워 마지않는 한국의 투표권이 기관의 안일함과 음모론자들의 선동 사이에서 상처 입고 있는 현실에 대해 선관위의 뼈저린 반성과 전면적인 인적·조직적 쇄신이 반드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