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메뉴 보기 검색

밀실 결정·매뉴얼 부재·늑장 대응… 부실 시스템이 부른 참사 [투표지 부족사태 후폭풍]

입력 :
수정 :
폰트 크게 폰트 작게
91개 투표소 파행 원인 분석

투표용지 최소 인쇄 기준 50%
회의 없이 2명이 전결로 결정
부족 대응 가이드라인도 없어

중앙선관위, 내부 보고가 아닌
유권자 항의 전화로 사태 파악
사실상 투표 끝날 무렵에 대응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6·3 지방선거 관리 실패는 단순한 행정 착오가 아니라, 헌법기관의 의사결정 부실과 밀실 행정, 현장 대응 무능이 한꺼번에 드러난 총체적 참사였다. 명확한 근거나 의결 절차 없이 투표용지 최소 인쇄 기준을 낮춰놓고도 대응 매뉴얼과 예비 인력은 준비하지 않았다. 선거 당일에는 투표용지 부족 가능성을 현장에서 감지했지만 중앙선관위는 뒤늦게 유권자 항의 전화를 받고서야 사태를 공식 인지했다. 국민참정권을 보장해야 할 선거관리기관이 스스로 국민참정권 침해 사태를 키운 셈이다.

 

◆회의 없이 기준 낮춘 선관위

 

10일 더불어민주당 양부남, 국민의힘 김승수·김민전 의원이 중앙선관위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중앙선관위는 지난해 12월10일 사무총장 전결로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종합관리지침’을 확정했다. 투표용지 인쇄 매수 기준을 기존 60%에서 50%로 줄였는데, 공식 회의는 열리지 않았다. 내부 2명의 전결로 기준이 바뀐 것이다.

중앙선관위 과천청사의 모습. 뉴스1
중앙선관위 과천청사의 모습. 뉴스1

같은 달 24일 선거정책실장 전결로 ‘공직선거 절차 사무편람’도 같은 내용으로 개정했는데, 이때도 공식 회의는 없었다. 중앙선관위는 투표용지 인쇄 매수 하한 기준을 2009년 80%에서 2016년 70%, 2021년 60%로 줄여왔다고 밝혔다. 관행적으로 최소 기준을 점점 낮췄을 뿐 사상 초유의 국민참정권 침해 사태를 초래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단 한번의 공식 회의도 열리지 않은 셈이다.

 

중앙선관위가 정한 최소 50% 기준에 따라 서울 송파구선관위는 전체 27개 동 중 잠실3·4동을 뺀 25개 동의 투표용지 인쇄 비율을 50%로 결정했다. 지역 선관위는 예상 사전투표율 등 각 지역 실정을 감안해 투표용지를 준비하게 된다. 송파구의 6·3 지방선거 투표율은 65.8%로, 서울 25개 자치구 중 네 번째로 높았다. 서울 평균인 63.6%와 비교해도 2.2%포인트 높은 수치다.

 

투표용지를 넉넉하게 인쇄하지 않은 이유는 사전투표율 증가, 짧은 인쇄 시간에 따른 투표용지 인쇄소 확보 어려움, 수백만 장에 달하는 투표용지 검수·보관 부담, 잔여 투표용지 분실 우려 등을 들었다.

 

100 단위 아래를 버리는 ‘절사’ 관행으로 그마저 최소 기준 50%를 지키지 않은 투표소도 전국 1371곳에 달했다. 예를 들어 송파1동 제4투표소의 선거인(3999명) 50% 기준은 1999.5명이지만, 100 미만 숫자를 버린 탓에 1900매만 인쇄했다.

잠실 투표소 현장 검증 서울동부지법 관계자들이 10일 오후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한 잠실7동 제2투표소였던 서울 송파구 우성아파트 노인정의 현장 검증을 마친 뒤 현장을 빠져나오고 있다. 법원은 전날 서울시장 후보였던 김정철 개혁신당 최고위원이 신청한 증거보전 사건에서 일부 인용을 결정하고 이날 현장 검증을 진행했다. 유희태 기자
잠실 투표소 현장 검증 서울동부지법 관계자들이 10일 오후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한 잠실7동 제2투표소였던 서울 송파구 우성아파트 노인정의 현장 검증을 마친 뒤 현장을 빠져나오고 있다. 법원은 전날 서울시장 후보였던 김정철 개혁신당 최고위원이 신청한 증거보전 사건에서 일부 인용을 결정하고 이날 현장 검증을 진행했다. 유희태 기자

◆매뉴얼도 예비 인력도 부재

 

중앙선관위는 투표용지 수요 예측이 빗나갔을 때를 대비한 마땅한 대응책도 세워두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투표용지 부족 상황이 발생할 경우 업무 처리 절차와 역할 분담 등 가이드라인이 없었던 탓에 유권자들의 대기 시간은 길어졌다.

 

선거 당일 예측보다 투표율이 높아졌을 때 잔여 투표용지를 중간에 파악하는 절차도, 부족한 투표용지를 어디서 얼마나 확보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도 없었다. 투표용지를 기다리는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안내해야 하는지도 현장에 제대로 공유되지 않았다. 현장 관계자들이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셈이다.

 

부족한 인력도 문제가 됐다. 투표용지가 부족한 송파구 22개 투표소에 투표용지 배달에 나선 송파구선관위 직원은 5명에 불과해 신속한 대응에 한계가 있었다. 나머지 직원 8명은 개표소 관리 감독 등 다른 업무를 맡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송파구선관위는 선거 당일 오전 11시40분쯤 서울시선관위에 투표용지 부족 가능성에 대비해 시위원회 보관 투표용지에 일련번호를 부여할지 여부를 문의했다. 정작 중앙선관위는 오후 4시25분에야 민원인 전화를 받고 나서 사태를 공식적으로 처음 인지했다.

 

서울시선관위는 오후 5시10분 송파구선관위에 무번호 투표용지 소진을 재확인한 뒤 관내 인근 투표소에 있는 여유분을 회수해 옮기라고 안내했다. 중앙선관위 선거상황실은 오후 6시20분이 돼서야 서울시내 14곳 투표소의 투표용지 부족 상황을 파악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중앙선관위가 밝힌 투표용지 부족 투표소는 이날 현재 전국 91개 투표소로 늘었다. 서울 42곳, 경기 23곳, 인천 11곳, 대구 4곳, 부산 3곳, 울산·경남·전남 각 2곳, 충북·전북 각 1곳에서 투표용지 부족이 발생했다.

4일 오전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투표함 이송이 지연되고 있는 서울 송파구 잠실7동 제2투표소에서 시위대와 일부 주민들이 선거관리위원회 해체를 외치고 있다. 뉴스1
4일 오전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투표함 이송이 지연되고 있는 서울 송파구 잠실7동 제2투표소에서 시위대와 일부 주민들이 선거관리위원회 해체를 외치고 있다. 뉴스1

◆곳곳서 내부 비판 ‘봇물’

 

선관위 내부에서도 인력과 구조적 한계로 인한 문제점을 인정하고 있다. 선관위 한 직원은 지난 7일 선관위 비공개 게시판에 올린 ‘고해성사’라는 제목의 글에서 “송파구 등 해당 위원회 직원들이 무능하고 무책임해서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 언젠가는 어디선가 터질 사고가 이번에 운 나쁘게 거기서 터졌을 뿐”이라고 고백했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은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예견된 참사였다”고 꼬집었다. 전공노는 이날 서울 종로구 서울시선관위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그동안 선관위는 방대한 조직을 유지하면서도 선거 현장의 핵심 업무는 지자체 공무원에게 떠넘겼다”며 “선거 업무는 선관위가 책임지고 수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자리 잡게 하고, 단독 수행이 어려운 사무는 법으로 정해 그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선 지방공무원들도 이번 사태를 두고 “터질 게 터진 것”이라며 부글부글하는 분위기다. 서울 한 자치구 공무원은 “선관위는 동 주민센터 공무원들이 하는 걸 보고만 받고, 지시하고 감시만 하려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