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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얇은소설] 몇 개의 내가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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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게 나누려고 ‘나’ 복제
고통 사라지면서 권태에 빠져
‘자기 복제 허상’ 진실 깨달아
“나다운 삶은 뭘까” 질문 던져

수전 손택 ‘인형’(‘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에 수록, 김진유경 옮김, 이후)

‘예술에 온 정신이 팔린 심미가’ ‘열렬한 실천가’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작가가 있다. ‘해석에 반대한다’, ‘타인의 고통’ 같은 책으로 한때 미국 최고의 에세이 작가이자 예술평론가로 널리 알려졌던 수전 손택. “스스로는 원칙적으로 소설가”인 그녀는 소설을 쓰기 전에 “반드시 글로 쓸 필요가 있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걸 새 형식으로 시도해 보길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유일한 소설집으로 봐도 무방한 ‘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에는 그렇게 자기 초월을 모색하고 삶을 바꾸고 싶어 하는 인물들의 이야기 여덟 편이 수록돼 있다.

조경란 소설가
조경란 소설가

그 중, ‘인형’이 문득 떠올랐던 건 소설 속 일인칭의 인물처럼 “내가 처한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였다기보다는 좀 지친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앞의 사람에게 무심코 이런 말을 해버려서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땐 몸이 여러 개여서 어머니를 모시고 규칙적으로 병원에 가야 하는 나, 살림해야 하는 나, 강의하러 가는 나, 책만 읽을 수 있는 나로 좀 나눴으면 좋겠다고. ‘인형’의 ‘나’, 시점인물인 그는 세상의 문제는 오직 두 가지 방법, 즉 “죽거나 복제하거나”만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으므로 후자의 방법을 선택하기로 한다. 전자공학 기술자와 화가의 도움과 큰돈을 들여 자신과 똑같은 플라스틱 인형을 하나 만들기로.

화창한 월요일 아침에 그는 정말 그 복제품이 자신의 대역을 해낼 수 있을지 염려하면서 인형의 태엽을 감고 작동시켰다. 인형이 일어나서 자신처럼 아내와 아이들과 아침을 먹고 출근을 했다. 자기 자신인 실물 크기 인형의 관찰자가 된 그는 마음이 놓였다가 직장에서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인형이 스트레스 때문에 줄담배를 피우는 걸 보고 대체 얼마나 힘들게 살아온 것일까,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인형은 별 탈 없이 임무를 수행하고, 그는 자신의 피조물에 만족하며 이제 정말 원했던 삶을 살려고, 그런 사람의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마음먹는다. 북극 탐험가, 피아니스트, 정치가로. 누가 되든 “고통은 쏙 빼고 즐거움만 누릴 수” 있는 삶을.

몇 달 후 인형에게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새 비서 ‘사랑’양이 오면서부터. 회사에 더 오래 남아 있고 회의 준비도 열심히 하고. 그는 인형이 못마땅하지만 감정이 풍부한 데는 놀라기도 했다. 어느 날 인형이 그에게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사랑양을 사랑하게 돼 당신의 아내와 집을 떠나고 싶다고, 자기 인생을 살고 싶다고 말이다. 그걸 막으면 자신을 스스로 해체해 작동을 멈춰버릴 수도 있다고.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전에는 삶이 그저 견디기 좀 힘들 뿐이었는데 지금은 예전의 삶에 대해선 생각조차 하기 싫어진 상태니. 아무 걱정이 없어진 그가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그는 “세상의 밑바닥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노숙인이 되었다.

자기 복제용으로 만든 인형은 욕망을 갖게 되었고 삶에서 고통과 어려움이 다 사라져 버린 그, 그토록 원했던 “누군가가 된다는 것 자체가 지겨워진” 그, 권태에 빠진 그는 그런 사람이 된 셈이다. 처한 상황을 한 번 더 견딜 수가 없게 된 그가 선택한 방법은 무엇일까. 다시 복제. 두 번째 인형을 만들었다. 첫 번째 인형에게 돈을 빌려서. 9년 후, 야간 대학에 다닌 첫 번째 인형은 건축사가 되었고 교사 자격증을 딴 사랑양과 잘 산다. 두 번째 인형은 예전의 그처럼 무덤덤하게 아내와 살고 아파트로 이사도 했다. 그는 변한 게 없고.

제목 ‘인형(The Dummy)’에는 대역, 꼭두각시, 허수아비라는 뜻도 있다. 이 단편은 수전 손택이 평생 제시했던 “나는 하나인가?”라는 질문이 숨어 있는 듯도 하다. 되고 싶은 나, 남들에게 보이고 싶은 나, 벗어나고 싶은 나. 가장 인간답고 나다운 나는 어떤 나일까. 자기 복제의 허상을 내려놓고 지금은 진짜인 나로 살고 싶어진다. 시간과 감정을 쪼개 병원도 가고 시장도 가고 강의도 나가고 작업실도 가면서. 대역 없이 온전한 나로, 심심찮게 자기 복제를 원하는 자아의 일부와 싸우고 화해하고 격려하면서.

 

조경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