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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계승자의 외로운 어깨 [종교칼럼]

법정은 원래 차가운 곳이다. 신앙도, 눈물도, 사명도 증거가 되지 못한다. 오직 사실과 증언, 법리와 판결만이 오간다. 그래서 법정에 선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결백을 설명하거나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한다. 그것이 법정의 언어다. 그런데 지난 12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법정에 선 한학자 총재의 발언은 조금 달랐다. 그는 자신에게 제기된 의혹을 부인한 뒤 곧바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이 평생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왜 세계를 돌며 평화를 이야기했는지, 왜 창조주 하늘부모님의 꿈을 이루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는지에 대해 말했다. 어떤 이에게는 법정에서 교리를 늘어놓는 모습이 답답하게 비쳤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한 인터넷 매체는 이를 ‘10분간 나홀로 교리 설명’이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그 표현을 읽으며 불편함을 느꼈다. 언론은 종교를 비판할 자유가 있다. 종교 지도자를 검증할 자유도 있다. 종교단체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 역시 언론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러나 종교를 비판하는 것과 종교를 조롱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교리 설명’ 정도면 될 일을 굳이 ‘나홀로 교리’라고 표현해야 했을까. 그 표현 속에는 비판을 넘어선 냉소가 스며 있다. 그 종교를 믿는 수많은 신도들의 신앙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취급하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더구나 이는 처음도 아니다. 같은 매체는 10개월 전 법정 공방을 두고 ‘통일교 고위 간부와 윤영호의 개싸움’이라고 표현했다. 법정에서 오간 치열한 진술 공방을 비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언론이 스스로 법정 다툼을 ‘개싸움’이라 명명하는 순간, 독자에게 사실을 전달하는 위치에서 벗어나 사실의 전달자에서 감정의 주입자로 전락하고 만다. 종교를 비판하는 것은 언론의 자유다. 그러나 특정 종교의 교리를 ‘나홀로 교리’라 부르고, 법정 공방을 ‘개싸움’이라 명명하는 순간 언론은 비판자가 아니라 조롱자가 된다. 그것은 ‘프레이밍’이라는 힘을 가진 언어의 재치가 아니라 언어의 절제력을 잃은 결과일 수 있다. 특히 한 종교의 존립 자체가 사회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시기라면 더욱 그렇다. 

 

오늘날 가정연합은 창설 이후 가장 거센 역풍 속에 놓여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해산 문제까지 거론된다. 사회적 비판도 거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여전히 자신의 신앙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수많은 평범한 신도들이 존재한다. 종교를 비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신도들의 신앙까지 비웃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시선이 엇갈리는 법정의 풍경을 보며 문득 한 세기 전, 또 다른 계승자의 외로운 뒷모습이 겹쳐졌다. 동학 2세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이다. 1864년 1세 교주 수운 최제우가 처형된 뒤 동학은 사실상 궤멸 직전이었다. 조선 조정은 동학을 위험한 사상으로 규정했고, 동학교도들은 쫓기고 숨어야 했다. 창시자는 사라졌다. 남겨진 것은 탄압과 공포뿐이었다. 그때 해월은 도망쳤다. 그러나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는 보따리 하나를 들고 산과 들, 농촌과 산골을 떠돌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최보따리’라고 불렀다. 그렇게 30년 가까운 세월을 숨어다니며 동학을 지켜냈다. 천도교에는 이런 말이 전해진다. “수운이 창도했고, 해월이 지켰다.” 참으로 묵직한 말이다.

 

창시자는 길을 연다. 그러나 계승자는 그 길이 사라지지 않도록 자신의 인생을 바친다. 역사를 돌아보면 창시자보다 계승자가 더 외로운 경우가 많다. 창시자는 비전을 제시하지만, 계승자는 비판과 의심, 내부의 갈등과 외부의 공격을 동시에 감당해야 한다. 사람들은 창시자의 카리스마를 기억한다. 그러나 공동체를 실제로 지탱한 것은 이름 없는 수호자들이었다.

 

그날 법정에서 한 총재는 울먹였다. “창조주는 우리의 참부모이십니다.” 법정에서 울먹이며 자신의 사명을 말하던 한 노 종교인의 모습을 보며 한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역사는 어쩌면 위대한 창시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무너져가는 공동체를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계승자들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고. 종교 계승자의 어깨는 늘 외롭고 무겁다. 그 어깨 위에는 조직이 있고, 신도들이 있고, 스승이 남긴 유산이 있고, 무엇보다 스스로 내려놓을 수 없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명이 옳은지 그른지는 사람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한 인간이 평생 붙들고 살아온 신념까지 조롱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이유는 없다. 비판의 칼날은 매섭되, 인간과 신앙을 향한 최소한의 존중마저 저버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