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 이후 속속 드러나고 있는 선거관리위원회의 부실은 점입가경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선관위의 무능, 무체계, 무책임한 행태에 국민적 공분이 커지고 있다. 서울 잠실을 비롯한 100곳이 넘는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국민 참정권이 침해당하고, 개표 진행 중에 투표하는 전대미문의 사태를 빚은 건 한국 선거사의 최대 흑역사다. 민주주의 선진국임을 자부하는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후폭풍이 심상치 않다. 2030세대를 중심으로 서울 올림픽공원 인근에서 선관위를 규탄하는 시위가 열흘 이상 이어지고 있다. 전국 대학생들의 시국 선언이 잇따르고, 이 대열에 중·고등학생마저 동참하고 있다. 최근 온라인 여론조사를 보면 선관위 해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70%를 넘었다. 국민은 선관위가 선거 관리를 맡을 자격과 능력이 있는지 엄중하게 묻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부실만으로도 충격적이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한 투표소가 전국 91곳에 달했다. 투표가 중단됐다가 재개된 곳도 26곳에 이른다. 선관위는 투표용지 최소 인쇄 기준을 60%에서 50%로 낮추면서 공식회의도 열지 않고 사무총장 전결로 처리했다. 투표용지 관리는 선관위의 핵심 업무인데, 선관위원들을 패싱했다니 어이가 없다. 사후 대응도 엉망이었다. 선거 당일 추가 송부된 투표용지 2만여장의 약 70%는 일련번호가 없는 ‘무번호’ 용지였다. 현장에서는 번호를 손으로 적어 넣어 혼란을 키웠다. 국정조사와 수사를 통해 더 적나라한 실태가 드러날 게다.
개표 집계 오류, 선거인 명부 누락은 선관위의 존재 이유를 묻게 한다. 전북교육감 선거에서 전주의 한 투표소 개표 결과를 중복 입력하면서 다른 투표소 유권자 1104명의 표가 누락됐다. 오류를 발견하고도 “당락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공표도 하지 않았다. 충북 청주에서는 선거 당일 1000여명의 선거인 명부가 누락돼 투표가 지연됐다. 이게 말이 되나. 한마디로 총체적 부실이다.
선관위 관련 논란은 한두 번이 아니다. 2022년 대선 때는 투표용지를 소쿠리에 담아 옮기고 이미 기표한 용지를 유권자에게 나눠줬다. 2024년 총선 때도 사전 투표함 부실 관리로 시끄러웠다.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정치권은 특별감사관 도입·감사위원회 설치 등 각종 개혁 법안을 쏟아냈지만, 입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선관위가 고발권을 쥔 탓인지 여야 정치인들은 선관위 앞에선 무기력했다. 국회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다.
선관위는 그동안 ‘헌법상 독립 기구’라는 점을 내세워 단 한 번도 감사원의 직무 감찰을 받지 않았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2023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고위 간부 자녀들의 특혜 채용이 단적인 사례다. 선거가 치러진 올해 선관위 전체 직원의 6%에 달하는 180여명이 무더기 휴직에 들어갔다. 전쟁을 앞둔 군인들이 집단 휴가를 떠난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번 사태로 질타받는 와중에도 대구 선관위 직원이 청사 내에서 골프 스윙 연습을 한 건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다. ‘가족회사’ ‘신의 직장’이 따로 없다. 자정을 기대하기엔 너무 썩은 것 아닌가.
선진국에선 정부와 의회가 선관위를 통제하고 있다. 영국은 의회 산하 특별위원회가 선거위원회를 상시 감독한다. 국회에 대한 설명 책임이 명확하게 규정돼 있다. 프랑스는 선거 실무를 내무부가 맡되, 헌법위원회의 견제를 받는 구조다. 일본도 총무성 산하 선관위가 선거를 총괄하지만, 실무는 지방자치단체가 맡고 있다. 우리도 선관위 개혁안을 백지상태에서 다시 짜야 한다.
개혁의 방향은 분명하다. 선관위를 지금처럼 무소불위의 치외법권 영역으로 남겨둬선 안 된다. 선거 준비와 위기 대응 절차를 표준화하고 투표용지와 선거인 명부, 개표 관리 전 과정을 외부에서 감시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관리 소홀, 보고 누락에 대한 책임도 명확하게 묻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현직 대법관이 선관위원장을 겸직하는 어정쩡한 체제로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선관위의 고질병을 뿌리 뽑으려면 구조 자체를 바꾸는 개헌도 불사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