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를 집어삼킬 듯 건반 위를 질주하는 피아니스트. 2022년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 이후 클래식팬 기억에 강력히 각인된 임윤찬의 이미지다. 15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만난 임윤찬은 달랐다. 천재 소년으로 출발해 세계적 피아니스트로 단숨에 올라선 그가 이번엔 ‘여유’와 ‘성숙’으로 또 한 단계 성장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날 임윤찬의 연주회는 여러모로 특별했다. 그간 독주회나 정상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주로 선보여 온 그가 70년 넘는 역사를 지닌 오스트리아 실내악단 카메라타 잘츠부르크, 소프라노 임선혜와 함께 모차르트 협주곡 두 곡과 아리아를 한 무대에 올렸다. 올해 모차르트 탄생 270주년을 맞아 그가 펼치는 ‘모차르트 순례’의 한 걸음으로 프로그램과 출연진까지 임윤찬이 직접 짠 무대였다.
임윤찬은 프로그램북에 기획 의도까지 손수 적어 관객에게 건넸다. 연주자가 무대 밖의 글로 마음을 전하는 일은 흔치 않다. 그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이 세상은 어쩌면 맑고 순수한 장난뿐”이라는 생각에 어린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가 건반 앞에 앉게 된다고 적었다.
1부를 연 피아노 협주곡 제25번 다장조에서부터 임윤찬은 악단과 긴밀히 호흡했다. 예전의 임윤찬이 피아노를 통해 세계를 자기 안으로 끌어당기는 연주자였다면 이날의 그는 주변의 소리에 귀를 열고 기다릴 줄 아는 연주자였다.
2부에선 여유와 성숙이 한층 더 돋보였다. 첫 곡은 콘서트 아리아 ‘어찌 그대를 잊으리’. 소프라노 임선혜와 함께 만든 무대였다. 임윤찬이 성악과 호흡을 맞추는 건 보기 드문 장면이다. 피아노가 노래를 떠받치고 노래가 다시 피아노를 부르는 대화가 오갔다. 임윤찬은 이 곡이 지난해 힘들었던 시기에 자신에게 큰 위로가 됐고 그 순간이 이번 공연 기획의 영감이 됐다고 밝혔다. 본관이 같은 풍천 임씨인 임선혜와 오래전부터 이 곡을 함께하고 싶었다는 사연도 덧붙였다. 동료와 무대를 함께 만들어 가는 예술가로서 한 뼘 더 자란 모습이었다. ‘천재 피아니스트’라는 수식어를 지나서 자신이 원하는 무대를 설계하고 그 안에서 다른 연주자들과 호흡하는 단계로 들어선 것이다.
마지막 연주로 선택한 피아노 협주곡 제24번 다단조에서 임윤찬은 1·3악장 솔로에서 특유의 열정을 토해 내면서도, 카메라타의 정교한 앙상블을 여유 있게 지켜보며 합을 맞췄다. 이상권 평론가는 “이날 공연은 단순히 1786년에 탄생한 모차르트의 작품을 묶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이미 오페라와 실내악, 협주곡의 감각을 하나의 언어로 통합하고 있었음을 들려준 자리였다”며 “카메라타 잘츠부르크가 절제된 음향과 기민한 응답으로 그 언어의 골격을 세웠다면, 임윤찬은 피아노의 발화와 공명을 바탕으로 그 안의 노래와 긴장, 침묵을 현재의 감각으로 들리게 했다”고 평했다.
○From the Artist
저에게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 가슴 깊이 뜨거운 눈물을 흘린 순간들이 몇 번 있습니다. 모차르트 오페라 〈여자는 다 그래 Così fan tutte〉, 〈피가로의 결혼 Le nozze di Figaro〉, 그리고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4번과 25번이 그러했습니다. 이번 공연에 아쉽게도 연주 시간상 포함할 수 없었던 피아노 협주곡 26번 역시 제게는 너무나 소중한 작품입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 또 연주할 때마다, 이 세상은 어쩌면 맑고 순수한 장난뿐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저는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의 제 모습으로 돌아가 피아노 앞에 앉을 수 있게 됩니다. 그 순간에 제 스스로 느끼는 참된 벅참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카메라타 잘츠부르크와, 제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에스트로 스즈키 마사토와 함께 모차르트의 음악을 만들어갈 수 있게 되어 요즘 큰 기쁨과 설렘을 느끼고 있습니다.
2부 첫 곡인 모차르트 아리아 '어찌 그대를 잊으리 Ch'io mi scordi di te? (K.505)'는 지난해, 제가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시기에 큰 위로를 주었던 곡입니다. 이 곡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바로 그 순간이 본 공연을 기획하는 데 큰 영감을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이 곡을 저와 본관이 같은(풍천 임씨) 임선혜 선생님과 함께 해보고 싶은 바람이 있었습니다. 나름 흔치 않은 본관이라 저희끼리의 작은 유대감이 있습니다.
2026/2027 시즌에 제가 연주하게 될 모차르트의 소나타들 역시 저는 위와 같은 이유로 마음 깊이 사랑합니다. 물론 하나하나의 형태를 만들고, 각 작품의 캐릭터를 찾아가는 과정은 중요하지만 결국 가장 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노래할 수 있게 해 주는 작곡가는 언제나 모차르트라고 저는 느꼈습니다.
모차르트, 그리고 그에게서 순수한 영향을 받아 태어난 음악들을 위해 헌신하고 싶습니다.
― 피아니스트 임윤찬 ―
(임윤찬 & 카메라타 잘츠부르크 프로그램북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