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남부지방을 여행한 이는 더러 차창 밖으로 생경한 풍광을 목도했을 것이다. 녹음 속에서 누렇게 마른 대숲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대나무가 고사한 것인데 이 현상이 삼사 년 되었다. 대나무 자생지인 전라도와 경상도, 제주도에서 모두 목격된다. 규모가 큰 대숲은 물론 화단에 심긴 대나무들도 죽어간다. 대나무를 가까이에서 보면 더욱 놀랍다. 대나무들이 일제히 꽃을 피우고 있다. 댓잎 가지가 벼 이삭 같은 꽃대로 변하고 노란 꽃술이 실실이 내려 있는데 보리쌀만 한 씨앗(竹實)을 맺고 말라 가는 나무도 있다.
그간 대꽃은 신화의 꽃처럼 직접 본 이가 드물었다. 백 년에 한 번 핀다고 하며, 꽃을 피우고 나서 대숲이 깡그리 죽는다고 했다. ‘장자’에서는 봉황이 유일하게 먹는 열매가 죽실이라고 전한다. 대꽃이 피면 나라에 상서로운 일이라고 반기기도 하고, 난리가 날 징조라고 경계하기도 했다. 대꽃은 불가의 우담바라처럼 신비로운 대상이었다. 서정춘 시인은 ‘죽편(竹篇)’이란 시에서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이 걸린다’고 아득한 비유품을 내놓았다. 손택수 시인은 대꽃을 일러 ‘꽃이 피면 죽는 게 아니라 죽음까지가 꽃이다’라고 애틋하게 살폈다.
나 역시 어린 시절에 도깨비, 혼불, 구미호, 산갈치와 함께 대꽃 전설을 듣고 자랐다. 도깨비나 혼불 이야기는 진짜 전설로 남았으나 동심을 떠난 뒤로도 산갈치와 대꽃은 한번 봤으면 했다. 우리 고장에는 산에서 보름 살고, 바다에서 보름을 산다는 산갈치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다. 산갈치는 예전 63빌딩 수족관에서 박제로 보았다. 너무나 신비로워서 한동안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세계 곳곳에서 산갈치가 출현했다는 목격담이 잦다. 물론 심해어인 산갈치가 왜 해변으로 밀려와 죽는지 밝혀진 바 없다. 산갈치가 출현하면 심해에서 지진이 발생한다는 괴담도 따른다.
생을 통해 대꽃 구경을 열망했으나 좀처럼 볼 수 없었다. 가평의 축령산에 들어 조릿대꽃을 본 적은 있어도 솜대나 왕대의 꽃은 보지 못했다. 대꽃을 봤다는 노인을 구례 당몰샘에서 만난 적은 있다. 노인은 앞서 묘사한 대로 벼꽃 이미지를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최근 나는 반백 년 만에 도처에 핀 대꽃을 목도하고 있다. 신비로우나 그 꽃은 아름답지 않았다. 사철 청청하고 고아한 대숲이 별안간 폐허로 둔갑한 느낌이었다.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처럼, 재선충이 휩쓴 솔숲처럼 불길한 마음마저 일었다.
왜 대나무들이 갑자기 꽃을 피우는 걸까. 여러 가설이 있지만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은 모양이다. 식물학자 일부는 주기적인 개화설을 얘기한다. 우리나라에는 60여종의 대나무가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유전적 영향으로 종에 따라 60년에서 120년 주기로 꽃을 피우고 고사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설이다. 대숲 전체가 한꺼번에 꽃을 피우고 말라버리는 건 대나무가 뿌리로 번식하는 식물이라 그럴 만하다. 영양설도 있다. 대숲의 토양에 무기 영양소가 부족하거나 영양소의 불균형으로 개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꽃이 피기 시작한 건 2023년 봄부터였다. 그해 겨울에서 봄까지 남부지방에 가뭄이 극심했다. 제한 급수가 시행되었고, 인근 상사댐이 바닥을 드러냈다. 그러니까 대꽃은 가뭄이 남긴 흔적으로 추정된다. 2020년에 강릉 오죽헌의 오죽이 개화해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그 무렵 강릉 지역은 봄 가뭄이 심했다. 이로 미루어보면 주기적인 개화설이나 영양설보다는 기후 변화가 초래하는 재해가 아닌가 싶다.
내가 자주 찾는 순천만의 대숲에서도 비슷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솜대와 맹죽이 숲을 이루고 있는데 솜대 군락이 꽃을 피우고 망가졌다. 대숲 관리인에게 물으니 2023년 봄 가뭄 때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다행히 맹죽 숲은 피해를 면했는데 그해 봄 죽순이 올라오지 못했고, 그나마 일어선 죽순도 녹아내렸다고 한다.
올봄에는 비가 제법 내렸다. 맹죽 숲에서는 죽순이 맹렬하게 솟았다. 다른 해보다 굵고 기운찼다. 한 달 만에 찾았더니 키가 다 자라 있었다. 단박에 손뼘을 벌려 생을 세워놓고 백 년에 걸쳐 단단해지는 대나무를 바라보며 나는 기도하는 마음이 되곤 했다. 제발 꽃을 피우는 일이 없기를.
전성태 소설가 국립순천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