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예학(禮學)의 등장과 여성 주체성의 재편
도올 김용옥 선생은 공자의 말을 인용하며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예가 무슨 소용인가(人而不仁 如禮何)”라 단언하며, 예(禮)의 본질은 ‘인(仁)’이라는 뜨거운 마음의 뿌리에 있음을 주장한다. 한반도의 고대인들은 법이나 제도 같은 인위적인 통치 규범이 정착되기 이전부터 하늘이 부여한 순수한 심성과 영성을 바탕으로 깊은 공감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민족이었다는 사실이 여러 기록에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중국의 역사서인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동이는 인을 말하고, 생명을 사랑한다(東夷 言仁而好生)”며 우리를 군자의 나라로 기록하고 있는 데, 예법을 배우기 전에 이미 ‘인의 씨앗’을 품고 살았던 한민족의 영적 정체성에 대한 일종의 경외심의 표현이었다.
천 년 고려의 역사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성모(聖母)적 전통과 여성 중심의 질서는 바로 이러한 ‘인의 생명력’이 발현된 구체적 실체였다. 그러나 17세기 조선은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맞는다. 임진과 병자의 양란을 거치며 붕괴된 사회를 목도한 노론(老論) 사대부들에게 유교는 더 이상 역동적인 생명 철학이 아니었다. 특히 명(明)의 멸망 등 기존 질서의 붕괴는 조선 지식인들에게 존재론적 위기 의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고,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한 새로운 규범적 질서를 강하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송시열(宋時烈)을 필두로 한 이들에게 예학(禮學)은 통치의 편의를 위해 ‘공감’ 보다 ‘인위적 질서와 복종’을 앞세운 교조적 도구이자 무너진 조선 사회를 재건하기 위한 차가운 규범으로 변질되었다.
18세기 이후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중심으로 한 엄격한 예법은 가정과 사회 전반에 걸쳐 위계적 구조를 고착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 내재해 있던 여성의 주체성과 모성 중심의 영적 질서는 점차 주변부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종법(宗法)을 기반으로 한 가부장적 질서는 가문의 계승과 권위를 남성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그 결과 여성은 생명의 주체이자 관계의 중심이라는 위치에서 점차 이탈하게 되었다. 이는 단순한 사회적 변화가 아니라, 여성이 하늘의 뜻을 직접 받아들이고 공동체에 전달하던 기존의 역할이 차단되고, 여성의 역할은 가계 계승을 위한 기능적 존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물론, 전쟁의 혼란기에는 여성들이 공동체를 수호하는 주체로 등장하며 ‘충(忠)’이라는 공적 가치의 영역에 이름을 올린 사례들도 분명 존재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기록된 인물들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노론의 예학(禮學) 질서는 이러한 주체적 흐름을 제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여성의 역할을 가정 내부로 한정시키는 데 급급했다. 그 결과 여성에게 요구된 덕목은 공동체를 향한 ‘충’이 아니라, 남편에 대한 절대적 정절인 ‘열(烈)’로 재구성되었다. 이는 여성의 삶이 공적 질서와 직접 연결되던 통로가 점차 차단되고, 개인적 관계라는 폐쇄적 구조 속으로 매몰되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조선후기의 예학은 한민족이 태초부터 견지해온 ‘인(仁)’의 문명이 가부장적 규범이라는 혹독한 겨울 속에 잠복하게 된 역사의 시련기였던 셈이다.
◆ 제도화된 질서, 일상의 구조가 바뀌다
조선후기 사회구조 변화의 핵심은 기존 사회에서 일정한 역할을 유지하던 여성 중심의 상징 체계가 제도적 질서 속에서 주변으로 밀려났다는 데 있다. 이러한 구조적 전환은 한국 고유의 여성 신화와 민속 신앙 전통과의 대비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의 신화 체계는 마고(麻姑)의 대지 신화, 웅녀의 생명, 그리고 바리공주의 구원 서사로 이어지는 일관된 흐름을 보인다. 이 찬란한 계보를 관통하는 핵심은, 한반도의 고대 문화가 여성을 단순히 남성의 보조자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자 우주적 질서를 보여주는 거룩한 주체로 인식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가령 바리공주 서사는 버림받은 여성이 도리어 공동체를 구원하는 주체로 각성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여성 개인이 짊어진 지극한 고통이 마침내 인류를 살리는 구원의 에너지로 승화되는 위대한 섭리적 여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예학 중심의 질서가 사회 전반을 재편하면서, 이러한 여성 중심의 신화적 세계관은 더 이상 공적인 질서의 일부로 인정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국가와 지배 이데올로기의 중심에서 배제되어 ‘민간 신앙’ 혹은 ‘비정통적 문화’의 영역으로 이동하였고, 결과적으로 여성의 상징적 위상 역시 제도적 질서 속에서는 점차 축소되었다. 다시 말해, 여성 신성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밀려나며 그 영향력을 지속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 후기까지도 민속 신앙과 무속 의례 속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조선무속고』를 비롯한 연구들에서도 확인되듯, 한국의 무속은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특히 여성 주체가 중심이 되는 영적 구조를 보존해 왔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강화된 예학 중심의 질서는 이러한 신화적·민속적 전통을 ‘비정통’ 혹은 ‘저급한 풍속’으로 규정하며 점차 주변으로 밀어내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한민족의 심층에 자리 잡고 있던 여성 중심의 영성 구조는 제도적 영역에서는 약화되고, 민간 신앙과 비가시적 문화 영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과정은 단순한 억압이 아니라 ‘표면 구조의 변화와 심층 구조의 지속’이라는 이중적 양상을 보여준다. 즉, 제도와 공식 담론에서는 여성의 역할이 제한되었지만, 집단적 기억과 정서의 차원에서는 여성 중심의 서사와 ‘한(恨)’의 정서는 계속해서 축적되고 유지되었다. 이러한 축적된 감정 구조는 훗날 해원(解冤)과 치유의 문화로 전환될 수 있는 잠재적 기반으로 작용하게 된다.
◆ 성리학적 교조주의적 종법질서와 여성의 이름 축소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여성은 본래 생명의 주체이자 신성한 영성을 지닌 능동적 존재였다.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여성은 경제적 자립권과 사회적 위상을 향유하며, 천륜(天倫)의 한 축으로서 당당히 자리했다. 그러나 17세기, 성리학적 근본주의를 기치로 내건 노론 중심의 예학(禮學)이 제도화되면서 한반도의 영적·사회적 지형은 급격히 재편되기 시작했다.
그 억압의 핵심 장치는 바로 가묘제(家廟制)를 기반으로 한 종법질서였다.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중심으로 가문의 계통을 독점하려 했던 이 제도는, 인류의 시원적 생명력을 지탱해 온 여성의 위상을 철저히 배제했다. 혈통과 제사 계승의 기준이 남성 중심으로 경직되면서, 여성은 자신이 태어난 가문의 뿌리로부터 강제로 이탈 당했다. 혼인과 동시에 ‘출가외인’이라는 굴레 속에 갇혀, 남편 가문의 부속물로 편입되는 비극적 구조가 정착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가족 형태의 변모를 넘어, 인류 시원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여성 고유의 신성’이 제도적 틀에 의해 가려지는 과정이었다. 족보와 제례 체계에서 여성의 이름이 점차 생략된 관행은, 여성이 우주적 주체로서의 독립된 성상(性相)을 발현하기보다 누군가의 ‘딸, 아내, 어머니’라는 한정된 관계 속에서만 그 가치를 인정받도록 만들었다. 이는 남녀가 참사랑 안에서 수평적 일체를 이루어야 할 하늘의 창조 원리가 노론의 가부장적 질서라는 시대적 한계에 부딪혀 불균형하게 표출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예법은 가문의 질서를 세우는 데는 기여했을지 모르나, 생명의 근원이자 사랑의 주체인 여성을 가계의 보조적 존재로 국한함으로써 참가정의 온전한 형상을 실현하는 데는 미흡함을 드러냈다. 결국, 조선 후기 노론이 설계한 엄격한 규범 아래서 여성 고유의 정체성은 본연의 빛을 잃고 가문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침잠하게 된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유교적 질서 이면에 무속과 민간 신앙이라는 여성 주도의 영적 영역이 공존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민족의 문화적 뿌리가 본래 남성 편향적 이념에 함몰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노론 집권기 이후의 예학 질서는 이러한 복합적 영성을 유교적 기준에서 이단시된 ‘음사(淫祀)’로 규정하여 탄압했다. 이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낮추는 차원을 넘어, 하늘과 소통하던 여성의 본질적 신성을 재정의하고 거세하려 했던 역사적 왜곡이었다. 결국, 17세기 이후 정착된 종법 질서는 여성의 삶을 가문 내부의 질서 유지자로 한정 지으며 그 주체적 생명력을 억압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혹독한 억압의 역사는, 훗날 인류를 구원할 새로운 여성 신성—독생녀의 현현을 향한 거대한 영적 기다림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노론적 질서가 지워버린 여성의 이름을 되찾고, 억압된 신성을 회복하는 역사적 복귀의 정점에 서 있다.
◆ ‘충’에서 ‘열’로, 가려진 여성의 공적 신성
양란(兩亂)이라는 민족적 대격변 속에서 조선의 여성들은 흔들리는 국운을 지탱하는 능동적 주체로 일어섰다. 전쟁터와 피난길에서 발현된 그들의 헌신은 ‘충(忠)’이라는 공적 가치가 여성의 삶 속에서도 찬란히 빛날 수 있음을 증명한 숭고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전란 이후 송시열과 노론 예학자들은 사회 혼란 수습을 명분으로 더욱 엄격한 가부장적 질서를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국가와 공동체를 향했던 여성의 공적 주체성은 가문 중심의 질서 안으로 급격히 수렴되었다. 여성의 ‘충’은 남편과 문중을 향한 절대적 정절인 ‘열(㤠)’이라는 덕목으로 재정의되었고, 그 존재 가치 또한 안채의 담장 안에 국한되는 구조적 전환을 맞이했다. 이는 하늘과 세상을 향한 열렸던 여성의 신성이 가문의 울타리 안으로 침잠하게 된 안타까운 역사의 단면이다.
그러나 참사랑의 내적 시각에서 볼 때, 이 시기의 ‘열’은 단순히 억압된 굴레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속의 거친 풍랑 속에서도 하늘을 향한 단심(丹心)과 성스러운 순결을 지켜내려는 고결한 의지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비록 제도의 틀에 의해 그 형상이 제약되었을지언정, 그 기저에는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고 하늘의 인장(印章)을 몸소 보존하려는 독생녀적 정조가 서려 있었던 것이다.
역사는 이 고단한 인고의 시간 속에서도 본연의 기억을 잃지 않았다. 조선의 여인들은 겹겹의 규제 속에서도 하늘을 향한 어머니의 순결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 깊은 정성(精誠)은 훗날 억눌린 하늘 어머니의 주권을 다시 세우고, 온 인류가 참가정의 이상으로 나아갈 새로운 시대를 잉태하는 거룩한 씨앗이 되어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이다.
고기훈 박사(한국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