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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비린내가 말도 못했다”…서울 곳곳에 남은 6·25 전쟁의 상흔

북한군 서울대병원 학살, 제네바 협약 12조 위반
미아리 고개, 반야월 작사 ‘단장의 미아리 고개’ 노래로 알려져
1951년 3월16일 제2차 서울수복 당시 국군과 미군이 순찰을 돌며 태극기를 점검하는 모습. 뉴시스
1951년 3월16일 제2차 서울수복 당시 국군과 미군이 순찰을 돌며 태극기를 점검하는 모습. 뉴시스

 

“피난을 위해 서울역에 왔었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도저히 기차표를 구할 수 없었어요. 급한 대로 가족과 함께 제무시(GMC) 트럭을 얻어 타고 충남 공주시 금학동에 있던 친척 집으로 피난을 갔던 기억이 납니다”

 

24일 구 서울역사 내 문화공간인 ‘문화역 서울 284’에서 세계일보 취재진과 만난 이모(81)씨는 5세였던 6·25 전쟁 발발 당시 이곳에 운집했던 피난 행렬을 회상하며 이같이 말했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했던 6·25 전쟁이 76주년을 맞았다. 3년에 걸친 전쟁은 수많은 희생과 함께 깊은 상흔을 남겼다. 수도인 서울 역시 치열한 전투와 북한군의 전쟁범죄 속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전쟁이 끝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서울 곳곳에는 아직 지워지지 않은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 치열했던 시가전 현장부터 북한군의 전쟁범죄 현장까지, 서울에 남은 역사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 봤다.

 

서울역 시가전지 설명 팻말. 방승민 인턴기자
서울역 시가전지 설명 팻말. 방승민 인턴기자

 

◆ 1950년 9월26일, 서울 탈환을 위한 ‘서울역 시가전’

 

개전 직후, 파죽지세였던 북한군에 의해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국군은 1950년 9월15일 개시됐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수세에 몰린 북한군은 후퇴를 거듭했고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 수복 작전에 돌입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17일부터 서울로 진격해 18일 김포비행장을 확보한 데 이어 25일 영등포를 탈환해 한강 도하를 시작했다. 한강 도하 이후 한강 이북에서는 치열한 시가전이 이어졌다.

 

26일 아침 미 해병 제1연대에 배속돼 서울 탈환전을 벌이던 국군 해병대 제2대대는 서울역 앞에서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북한군은 남대문지하도와 당시 대한여행사 건물(현 남대문경찰서) 옥상에서 국군을 공격했다. 대한여행사 건물은 서울역 광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북한군은 도로 곳곳에 바리케이드와 대전차포, 기관총, 박격포 등의 무기를 설치해 저항했다.

 

서울역 시가전 당시 북한군의 방어 진지로 사용됐던 대한여행사 건물 자리(현 남대문경찰서). 방승민 인턴기자
서울역 시가전 당시 북한군의 방어 진지로 사용됐던 대한여행사 건물 자리(현 남대문경찰서). 방승민 인턴기자

 

북한군은 남대문지하도에서도 저항을 이어갔다. 제2대대가 화염방사기를 동원해 서울역 광장을 사이에 두고 대로 건너편의 건물을 방벽 삼아 격전을 벌인 끝에 서울역과 그 인근에서 저항하던 북한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서울역 광장. 방승민 인턴기자
서울역 광장. 방승민 인턴기자

 

개전 초기 피난길에 오르려는 수많은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한 서린 장소였던 서울역은, 북한군에 의해 서울이 점령된 후 치열한 혈투 끝에 수복한 곳이었다. 

 

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 의과대학 후문 주차장 인근에 있는 ‘이름 모를 자유전사의 비’와 ‘현충탑’. 방승민 인턴기자
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 의과대학 후문 주차장 인근에 있는 ‘이름 모를 자유전사의 비’와 ‘현충탑’. 방승민 인턴기자

 

◆ 북한군에 의한 국군 부상병 서울대병원 학살 사건

 

1950년 6월28일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했다. 전면 남침 개시 3일 만이었다. 이날 오전 9시쯤 서울의 최후 방어선인 미아리 고개를 돌파해 창경궁 앞에 다다른 북한군은 맞은편에 있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들이닥쳤다. 이때 서울대병원에는 약 1000명의 국군 부상병과 의료진, 일반 환자들이 있었다. 

 

육군본부 소속 조용일 소령과 남모 소위가 지휘하는 국군 1개 소대가 경계 태세를 갖추고 전투를 벌였으나, 병력과 화력에서 밀려 전원 전사했다. 교전이 끝난 후 북한군은 병원 안으로 난입해 국군 부상자와 일반 환자를 합쳐 900여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름 모를 자유전사의 비’ 팻말. 방승민 인턴기자
‘이름 모를 자유전사의 비’ 팻말. 방승민 인턴기자

 

원내에 진입한 북한군은 병동을 돌며 국군 부상병들을 학살했다. 일부 국군 장교들이 병실에서 권총으로 총격전을 벌이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끝내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음 날인 29일에는 부상병과 일반 환자들을 밖으로 끌어내 2차 학살을 자행했다. 당시 희생자 시신은 병원과 그 뒷동산 주변에 산더미처럼 쌓였다가 수일 뒤 거리에서 북한군에 의해 소각된 것으로 전해진다. 

 

건립취지문. 방승민 인턴기자
건립취지문. 방승민 인턴기자

 

이날 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 의과대학 후문 인근 박석고개에서 취재진과 만난 한승혁(83)씨는 서울대병원 학살 사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창경국민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한씨는 “서울대학교 병원 주변으로 시체가 즐비했다”며 “피비린내가 말도 못 할 정도로 많이 났다. 이곳 박석고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참혹한 현장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이어 당시 서울대병원 내 ‘함춘원’ 주변에서도 학살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함춘원은 창경궁의 후원으로 사도세자의 묘를 썼던 곳이다.

 

한씨는 “후퇴하던 국군들이 함춘원 인근에서 북한군에 의해 전사했다”며 “시체들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 영안실 주변 동산에서도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며 “서울대병원 주변은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고 말했다. 

 

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 의과대학 인근 박석고개. 방승민 인턴기자
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 의과대학 인근 박석고개. 방승민 인턴기자

 

북한군에 의해 자행된 서울대병원 학살 사건은 ‘제네바 협약 제12조’ 위반이다. 이 국제법은 적군이라 할지라도 부상자는 보호해야 하며, 생명에 대한 위협 또는 신체에 대한 폭행을 엄중히 금지하도록 정하고 있다. 북한군 치하 서울에서 참상을 목격했던 한씨는 그해 9월 초 가족과 함께 서울을 가까스로 빠져나와 남쪽으로 피난했다.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을 침공할 때 넘었던 미아리 고개(서울시 성북구 돈암동 49-14 일대). 방승민 인턴기자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을 침공할 때 넘었던 미아리 고개(서울시 성북구 돈암동 49-14 일대). 방승민 인턴기자

 

◆ 북한군의 서울 침공·후퇴 루트, 납북자들의 한이 서린 ‘미아리 고개’

 

서울 북부의 관문인 성북구 미아리 고개는 6·25 전쟁 당시 경기도 북부에서 의정부를 거쳐 서울 도심으로 들어오는 사실상 마지막 관문이자 주요 통로였다. 이곳은 서울의 함락과 수복을 거치며 수많은 이별이 겹친 참혹한 비극의 현장이었다.

 

1950년 6월25일 남침을 개시한 북한군은 불과 이틀 만인 27일 밤 미아리 고개 일대까지 진출했다. 국군 제5사단과 제7사단의 잔존 병력은 이곳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서울 진입을 막기 위해 항전했다. 북한군은 야간 기습과 함께 T-34 전차를 앞세워 공세를 이어갔고, 국군은 참호를 파고 맞섰다. 그러나 병력과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방어선은 무너졌고, 28일 새벽 1시 북한군은 미아리 고개를 넘어 돈암동 방면으로 진출했다. 이후 서울 전역이 북한군 수중에 들어가게 됐다.

 

미아리 고개는 전황이 바뀐 뒤 다시 한번 역사의 분기점에 놓였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 수복 작전에 나서자, 북한군은 서울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미아리 고개는 북한군이 서울을 빠져나가는 주요 후퇴 통로가 됐다. 6월에는 침공의 길이었고, 9월에는 패주의 길이 된 셈이다.

 

북한군은 철수하며 서울에 남아 있던 정·재계 인사와 국회의원, 독립운동가, 학자, 종교인 등 저명인사들을 대거 납북했다. 이들은 서울 중구 청계천로 30 일대(현 예금보험공사 본사 자리)에 있던 ‘애국인사 구금지’ 등에 억류돼 있다가 미아리 고개를 넘어 북으로 압송됐다.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던 조소앙, 원세훈 등도 이 납북 행렬에 포함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철사나 새끼줄에 묶인 채 맨발로 고개를 넘어야 했던 이들과, 뒤따르며 오열하던 가족들의 생이별은 이곳에서 아픔의 역사가 됐다.

 

반야월이 가사를 쓰고 이재호가 작곡한 대중가요 ‘단장의 미아리 고개’ 는 이러한 비극을 상징적으로 담아낸 노래다. 여기서 ‘단장’은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의미한다. 전쟁이 남긴 이별과 상실의 기억은 ‘미아리 눈물고개’라는 가사를 통해 대중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됐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 앨범. 연합뉴스
‘단장의 미아리 고개’ 앨범. 연합뉴스

 

격전이 벌어졌던 거리와 학살의 현장, 강제 이별의 길은 현재에도 서울 한복판에 남아 있다. 이 공간들은 전쟁이 남긴 상흔을 말없이 품은 채, 오늘날의 서울과 나란히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