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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록시’ 아이비, ‘한 우물’ 판 끝에 브로드웨이 선다

세계가 주목할 ‘한국의 록시’ 아이비
록시를 닮은 역경 속 당당한 태도
뮤지컬 배우 ‘아이비’가 지난 23일 서울 중구 충무아트홀에서 브로드웨이 진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그는 뮤지컬 ‘시카고’의 주인공 ‘록시 하트’역에 캐스팅됐다. 뉴시스
뮤지컬 배우 ‘아이비’가 지난 23일 서울 중구 충무아트홀에서 브로드웨이 진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그는 뮤지컬 ‘시카고’의 주인공 ‘록시 하트’역에 캐스팅됐다. 뉴시스

 

“뮤지컬 데뷔를 한 지 16년이 지났다. 나이도 많고 영어도 못 하지만, ‘한 우물’을 오랜 시간 팠더니 엄청난 기회가 찾아왔다.” 

 

뮤지컬 배우 아이비는 지난 23일 중구 충무아트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브로드웨이 진출 소식을 알렸다. 그는 오는 8월 17일부터 9월 6일까지 미국 뉴욕 앰버서더 극장에서 뮤지컬 ‘시카고’의 주인공 록시 하트 역에 캐스팅됐다. 

 

국내에서만 약 600차례 록시를 연기하며 ‘한국의 록시’로 불려 온 그가 마침내 언어의 장벽을 넘어 미국 관객과 만난다. 한국 배우가 브로드웨이 뮤지컬 ‘시카고’ 프로덕션 무대에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얼핏 기적 같은 성과로 보일 수 있으나 그의 행보를 돌아보면 이번 진출은 한 작품에 꾸준히 헌신하며 쌓아온 노력의 결실에 가깝다. 

 

군악대 출신인 아버지와 성악을 전공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이비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공연을 자주 접했다. 자연스럽게 음악 환경에 노출되면서 초등학생 때 합창대회와 중창대회에 빠짐없이 참가하는 등 일찍이 노래에 남다른 두각과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 아이비는 2005년 정규 1집 ‘My Sweet And Free Day’를 발표하며 데뷔했다. 원래 발라드 가수를 준비했지만, 1집 프로듀싱을 맡았던 박진영의 제안으로 댄스 가수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이럴 거면’, ‘유혹의 소나타’ 등 다수의 히트곡을 내며 가수 이효리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아이비의 뮤지컬 데뷔는 공연 제작사 ‘신시컴퍼니’의 뮤지컬 ‘시카고’를 관람한 것이 발판이 됐다. 이를 계기로 인연을 맺은 아이비는 2010년 뮤지컬 ‘키스 미 케이트’의 조연 비앙카 역을 맡으며 무대에 첫발을 디뎠다. 신시컴퍼니와의 이 특별한 만남은 훗날 아이비의 인생 캐릭터이자 대표작이 된 ‘시카고’의 록시 하트 역으로 이어졌다.

 

배역 록시를 향한 아이비의 애정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아이비는 2012년 ‘시카고’ 국내 초연에서 록시를 연기해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신인상을 수상했다. 이후 2024년까지 무려 여섯 시즌 동안 총 592회 무대에서 같은 배역을 소화했다. 이 때문에 아이비는 여러 인터뷰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배역으로 록시를 꼽아왔다.

 

록시는 우발적인 살인으로 교도소에 수감된 뒤에도 무죄 석방과 스타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인물이다. 위기 속에서도 돌파구를 찾아내는 재치와 밝고 강인한 성격은 록시를 대표하는 매력이다. 아이비 역시 록시의 야망과 긍정적인 에너지가 자신의 모습과도 닮았다며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2018년 5월 11일 서울 종로구 연지원 신시컴퍼니 뮤지컬 ‘시카고’ 연습실에서 뮤지컬 배우 아이비가 열연하고 있다. 뉴시스
2018년 5월 11일 서울 종로구 연지원 신시컴퍼니 뮤지컬 ‘시카고’ 연습실에서 뮤지컬 배우 아이비가 열연하고 있다. 뉴시스

 

화려한 무대 뒤에는 짙은 그림자도 있었다. 2016년 뮤지컬 ‘아이다’의 암네리스 역을 맡았을 당시 극심한 부담감으로 ‘무대 공포증’이 찾아온 것이다. 공연 중 가사를 잊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컸다. 그러나 록시의 강인함을 닮은 아이비는 스스로 다독이며 이를 극복해 나갔다. 그는 공연 전 거울을 보며 ‘더이상 어떻게 잘해. 이 정도면 충분하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되뇌며 용기를 북돋웠다. 무대 아래 느꼈던 공포감은 정작 무대에 오르면 해소되곤 했다. 또한 퇴장할 때마다 자신을 안아주는 훈련을 통해 긴장감을 다스렸다. 그렇게 실수 없이 무대를 마무리하고 커튼콜에서 쏟아지는 관객들의 박수를 마주할 때면 희열이 느껴졌다.

 

미국 프로덕션 측에서 먼저 진출 제안을 받은 아이비는 1년 동안 세 차례 영상 오디션을 거쳐 배역을 최종적으로 따냈다. 사실 4년 전에도 제안이 왔지만, 자기소개조차 겨우 가능한 수준의 영어 실력 탓에 고사했다. 그러나 재작년 다시 기회가 찾아오자 이번만큼은 놓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2014년 8월 5일 오후 서울 신도림 디큐브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시카고’ 프레스콜에서 뮤지컬 배우 아이비와 성기윤이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뉴시스
2014년 8월 5일 오후 서울 신도림 디큐브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시카고’ 프레스콜에서 뮤지컬 배우 아이비와 성기윤이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뉴시스 

 

오디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차 오디션에서는 발음을 지적받았고 이를 보완해 임한 2차에서는 악센트가 문제였다. 아이비는 부족한 부분을 끊임없이 보완하며 3차까지 이어갔다. 특히 최종 오디션은 뉴욕 지인의 집에 머물 당시 급작스럽게 요청받은 것이었다. 반주자를 구하기 위해 현지 교회 성가대 등 마을을 수소문한 끝에, 한 현지 아주머니가 도움을 자처했다. 그가 밤새 피아노 반주를 연습하고 집 거실까지 제공해줘 아이비는 가까스로 오디션 영상을 촬영해 보낼 수 있었다.

 

이처럼 치열했던 오디션의 이면에는 철저한 영어 준비도 있었다. 비즈니스 영어, 연기 발성, 악센트 등 분야별로 9명의 영어 선생님을 두는 등 주중에는 여느 학생보다 더 바쁘게 영어 공부에 몰두했다. 1년간의 치열한 사투 끝에 그는 마침내 브로드웨이 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이 같은 열정은 현지 제작진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들은 아이비가 국내에서 이미 수백 차례 록시를 연기했음에도 영어 공연을 위해 기초부터 다시 배우며 보여준 성실함과 성장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며 합격 소식을 전했다. 

 

아이비는 무대 공포증과 언어 장벽 등 숱한 난관을 록시와 같은 밝고 당찬 태도로 극복해 냈다. 뮤지컬의 본고장인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르는 그가 앞으로 또 어떤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줄지 전 세계 관객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