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연내 성과를 기대하는 핵추진잠수함 협력에 대해 오커스(AUKUS) 협력에 관여했던 전 미 국무부 고위 당국자가 “1년 이상 걸릴 수 있다”며 신중론을 내놨다. 미국 행정부의 정치적인 의지만으로 결정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지적한 것이다.
엘리엇 강 전 미국 국무부 국제안보·비확산 담당 차관보는 26일 제주 해비치호텔에서 열린 제21회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제주포럼 ‘한·미동맹 현대화, 핵추진잠수함 도입, 중국 요인’을 주제로 한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이같이 말했다. 컨퍼런스에는 수잔 손튼 전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대행과 강 전 차관보가 참석했고,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가 사회를 맡았다.
◆美 원자력법·의회 절차 변수
강 전 차관보는 한국 정부가 올해 안에 핵추진잠수함 관련 한·미 협의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놓을 수 있다고 보느냐는 취지의 질문에 “1년 이상 걸릴 수 있다”며 “이 문제는 단순히 미국 행정부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핵추진잠수함은 핵무기를 싣는 잠수함이 아니라 원자로를 동력으로 쓰는 잠수함이다. 한국이 이를 추진하려면 잠수함 원자로에 들어갈 핵연료 공급, 원자력 기술 협력, 비확산 안전장치 등을 미국과 조율해야 한다. 핵추진잠수함이 군사 장비 문제인 동시에 원자력 물질을 다루는 문제인 만큼, 미국 행정부가 정치적으로 동의하더라도 미국의 원자력법과 의회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핵추진잠수함 협력을 위해서는 기존 한·미 민간 원자력 협력의 기본 틀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한국이 원전 산업에서 미국과 협력해 온 기존 규칙만으로는 군함 추진용 원자로에 들어갈 핵연료 공급 문제를 처리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취지다. 강 전 차관보는 약 10년 전 한·미 원자력 협력 관련 협상에 관여했을 때도 여러 어려움 때문에 수년이 걸렸다고 부연했다. 그는 핵무기용은 아니더라도 군사적 사용을 위한 핵물질 공급에는 별도 협정이 필요할 수 있고, 그 협정이 상호방위협정 성격을 띨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강 전 차관보는 미국·영국·호주 3국 안보협력체인 오커스(AUKUS) 사례에도 주목했다. 오커스의 핵심 축 가운데 하나는 호주가 재래식 무장을 탑재한 핵추진잠수함 능력을 확보하도록 미국과 영국이 지원하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 사이에 관련 사안에 대한 기존 상호방위협정이 있었는데도 오커스 추진에는 긴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한국의 핵추진잠수함 협력이 정상 간 합의나 행정부 설득만으로 빠르게 처리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든 셈이다. 그는 오커스가 공개되기 전 국무부에서 관련 논의에 관여했다.
오커스와 한국 사례가 다르다는 점도 고려할 요소다. 그는 호주가 연구용 원자로를 제외하면 민간 원자력 기술, 산업, 인적 자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고 설명했다. 반면 한국은 세계적인 원전 산업과 기술 기반을 가진 국가다. 이 때문에 한국의 핵추진잠수함 협력은 비확산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 원전 산업의 경쟁력과 미국 원자력 산업의 이해관계까지 함께 얽힐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핵무장론 커지면 협상 복잡”
강 전 차관보는 한국 내 핵무장론이 커질 경우 협상이 더 복잡해질 수 있다고도 경고했다. 그는 “한국의 친구로서 말하자면, 한국 국민 다수가 한국은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는 견해를 표명하면 상황이 복잡해진다”고 말했다. 핵추진잠수함 논의와 자체 핵무장론이 함께 부각되면, 미국과 국제사회가 이를 비확산 위험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메시지와 협상이 신중하고 정확하며 인내심 있게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핵추진잠수함 협력을 원한다면 핵무장론과 분리해 메시지를 관리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다만 한국의 핵추진잠수함 구상 자체에는 지지 입장을 밝혔다.
강 전 차관보는 핵추진잠수함 협력이 제대로 설계되면 한·미 민간 원자력 산업 협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국이 필요한 핵연료를 미국에서 공급받는 구조가 만들어지면, 잠수함뿐 아니라 민간 원전 분야에서도 양국 협력이 확대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상업적, 정치적, 안보적 측면에서 모두 ‘윈윈’이라고 짚었다. 반면 협상이 잘못될 경우에는 핵추진잠수함 협력은 물론 아니라 한·미 민간 원자력 협력도 크게 후퇴할 수 있다고 봤다.
또한 강 전 차관보는 핵추진잠수함과 원전 협력을 양국의 군사 문제를 넘어 중국과의 기술·산업 경쟁 속에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과 미국은 핵추진잠수함 협의를 진행해야 하는 관계이면서도, 중국과의 경쟁 구도에서는 같은 팀이라는 뜻이다. 중국은 한국이 우위에 있는 주요 산업에서 한국을 대체하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반면 미국은 한국과 산업 구조와 민주주의 가치, 인적 연결 측면에서 보완적 관계라고 정의했다.
한편 손튼 전 차관보는 한·미동맹 현대화를 대화와 협력의 범위를 넓히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수십 년간 한·미동맹 논의가 주로 안보, 국방, 주한미군, 한미연합군사령부, 북한 등 역내 위협 방어에 집중돼 왔지만, 앞으로는 새로운 무기체계, 무역 갈등, 기술과 산업 협력 등 더 넓은 의제가 동맹 안에서 다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핵추진잠수함 논의도 이 같은 동맹 현대화의 대표 사례로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