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보는 1944년 7월2일 개성박물관의 관장 고유섭(高裕燮)이 지병인 위궤양증으로 와병했다가 회복되는 가운데 6월26일 갑자기 악화되어 별세했다고 보도했다. 아울러 그가 조선미술사 연구에 온몸을 바쳤으며 개성(開城)으로서도 큰 손실이었다고 덧붙였다. 1905년 2월생이니 우리 나이 40세에 유명을 달리한 셈이다.
이어서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채 1년이 안 되는 1946년 7월 현대일보에 사립 보성고등보통학교의 동창으로서 고유섭의 평생지기였던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 이강국(李康國)이 고유섭 별세 2주기를 맞아 그의 삶과 업적을 회고하는 글을 실었다. 그는 여기서 미소공동위원회 개최를 촉구하는 인천시민대회에 참가했다가 미망인을 만난 비통함을 토로한 뒤 해방의 환희를 같이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표했다. 나아가 고유섭이 “권세에 저항하는 성격, 수양된 민주주의정신과 과학적 세계관, 풍부한 학식, 고결한 인격, 얼마나 신조선건설에 특히 민주주의적인 민족문화발전에 위대한 공헌이 있었을 것이냐? 생각할수록 한만 깊어진다”고 하며 추모기를 마쳤다. 이강국의 이러한 추모기에 간간이 엿보이는 정치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독창적이며 빛나는 문화예술이 있다”는 고유섭의 지론은 사회주의자 이강국에게도 울림 있는 외침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일제강점기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고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의지를 이보다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필자가 고유섭의 존재를 인지한 계기는 그의 명저 ‘조선탑파의 연구’(1947) 초판본을 접한 때였다. 1980년대 중반 군 복무 시절에 부대의 가까운 동료가 선친의 소장본들을 필자에게 기증하였는데 그 가운데 이 책이 들어있었다. 비록 필자가 미술사에 깊은 관심이 없는지라 그 책을 제대로 정독하지 못했음에도 그의 숨결은 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1994년 어느 날인가 그의 제자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냉큼 서점으로 달려가 구매한 뒤 탐독하면서 고유섭의 존재를 조금씩 알아갔다. 스승이 어떤 인물이었기에 제자의 글이 한국미술을 이렇게 유려하고 정감이 있는 필체로 담을 수 있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북 영주 부석사를 들러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무량수전 앞에 서면 왠지 최순우를, 고유섭을 만날 듯하였다. 또 어느 해인가 오후 늦은 시각에 학생들과 함께 부석사를 들러 안양루(安養樓)에서 석양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법고를 치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러한 시공간의 향연은 속세를 떠나 청정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을 자아냈다.
한편, 고유섭은 필자에게 또 다른 인연으로 다가왔다. 인천 축현(싸리재) 출신으로서 개성에서 미술사학계 후진들을 양성한 그의 이력이 독특하였기 때문이다. 축현은 필자가 존경하는 스승의 성장지였고 개성은 내 연구에서 한 번도 주변으로 밀려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짧은 기간에 불꽃 같은 열정을 다 바쳐 한국미술사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며 미술사학계의 기라성 같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특히 한국의 고미술을 두고 “누천년간 가난과 싸우고 온 끈기 있는 생활의 가장 충실한 표현이요, 창조요, 생산임을 깨닫고 있다”는 그의 고백은 늘 나침반으로 삼아야 할 경구가 아닌가. 언젠가 다시 한번 그의 기념비가 서 있는 인천시립박물관에 가고 싶다.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