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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로 시작해 책상까지 친 32차례 남북 핵협상… 30여년 전 문서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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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전 남북이 북핵 문제를 직접 풀어보려 협상을 이어가던 당시의 구체적 상황을 담은 기록이 공개됐다. 양측 대표들은 “악수를 몇 번 하면 통일되겠나”며 화기애애하게 회담을 시작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왜 책상을 쳐!”라는 고성까지 주고받으며 치열하게 충돌했다. 남북은 비핵화 선언과 핵통제공동위원회 구성까지 합의했지만, 실제 검증 방식인 사찰규정을 만들지 못하고 끝내 결렬됐다.

 

통일부는 30일 공개한 1991년 12월부터 1993년 1월까지 남북한 북핵 문제 협의 기록에 담긴 내용이다. 남북한은 이 기간 총 32차례 협의를 가졌다. 대표접촉과 회의는 판문점 남측 지역 ‘평화의 집’과 북측 지역 ‘통일각’ 등에서 이어졌다. 1991년 12월 대표접촉 3회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도출했고, 1992년 2∼3월 대표접촉 7회로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구성·운영 합의를 이뤘다. 하지만 1992년 3월부터 1993년 1월까지 이어진 회의·위원접촉·위원장접촉 22차례를 통해 사찰규정을 논의했지만 검증 방식을 정하는 데서 멈췄다. 합의문과 이행기구는 만들었지만, 검증 장치는 만들지 못한 셈이다.

 

1992년 4월1일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제2차회의에서 양측 대표가 인사를 하고 있다. 통일부 제공
1992년 4월1일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제2차회의에서 양측 대표가 인사를 하고 있다. 통일부 제공

◆선언은 만들었지만, 사찰서 멈춘 협상

 

초반 흐름만 보면 협상은 빠르게 진행됐다. 남북은 1991년 12월26일 첫 대표접촉을 시작한 뒤 닷새 만에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가서명했다. 당시 회의는 6차례 정회하면서 7시간30분가량 이어졌다. 공동선언은 핵무기 보유·사용 금지와 핵재처리시설·우라늄농축시설 보유 금지 등 원칙을 담았다. 비핵화 검증을 위해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가 정하는 절차와 방법으로 사찰을 실시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어 남측은 1992년도 한·미 연합훈련 팀스피리트 중단을 발표했고 북측은 국제핵사찰 수용 성명을 내면서, 비핵화 합의가 궤도에 오른 듯 보였다. 

 

회의 초반에는 부드러운 환담과 날 선 신경전이 교차했다. 1992년 3월4일 제4차 대표접촉에서는 사찰규정 마련과 사찰 개시 시한을 두고 남북 대표가 상대방의 ‘산수 실력’을 운운하며 충돌했다. 그러나 이틀 뒤 제5차 대표접촉에서는 임동원 남측 대표가 “악수를 한번 더 합시다”라고 하자, 최우진 북측 대표는 “악수를 몇 번 하면 통일되겠나”는 식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최 대표는 개성 역사박물관을 둘러본 얘기를 꺼내면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를 빨리 통일하기는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992년 4월21일 통일각에서 열린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제3차회의에서 고성이 오가고 있다. 통일부 제공
1992년 4월21일 통일각에서 열린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제3차회의에서 고성이 오가고 있다. 통일부 제공

사찰을 둘러싼 갈등은 핵통제공동위가 공식 출범한 1992년 3월19일 이전부터 나왔다. 제5차 대표접촉에서 정보교환과 사찰대상 문제에 일부 접근했지만, 사찰규정 마련 시한과 시범사찰 문제에서는 접점을 찾지 못했다. 나흘 뒤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에서 열린 제6차 대표접촉에서는 감정싸움까지 벌어졌다. 남측 임 대표가 북측을 향해 “핵문제 토의하는 사람이 핵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하는 놈이…”라고 몰아붙였고, 북측 최 대표는 “야! 어디 책상을 쳐!”라고 반발했다.

 

핵통제공동위가 공식 출범한 뒤 충돌은 더 뚜렷해졌다. 1992년 3월19일 핵통제공동위 제1차 회의에서 남측은 5월 중순까지 핵사찰 규정을 채택하고 6월 초순까지 상호사찰을 실시하자며 사찰규정안 12개 조항을 제시했다. 반면 북측은 비핵화공동선언 이행합의서와 별도 사찰규정 초안을 내면서 주한미군 철수, 팀스피리트 연습 영구 중지, 외부 핵위협 공동대처를 다시 거론했다. 남측이 북핵 의혹 검증을 요구하면, 북측은 주한미군 핵무기·핵기지 문제를 내세우는 구도가 첫 회의부터 굳어진 셈이다.

 

봄·여름 회의에서도 사찰규정 논의는 제자리걸음이었다. 1992년 5월26일부터 6월6일까지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영변 등 14개 지역을 사찰했지만, 남측은 국제사찰만으로는 북핵 의혹을 해소할 수 없다며 남북 상호사찰 규정 채택을 요구했다. 6월30일 판문점 남측 지역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제6차 회의에 이어 7월21일 북측 지역 통일각 제7차 회의, 8월 31일 평화의 집 제8차 회의에서도 남측은 사찰규정 우선 토의를 요구했지만, 북측은 IAEA 사찰 결과와 핵부재 선언 등을 앞세우며 논의를 비켜갔다. 사찰 대상과 방식에 대한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협상은 가을 들어 한·미 연합훈련인 팀스피리트 재개 문제로 더 꼬였다.

 

1992년 1월20일 정원식 당시 국무총리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문에 서명하고 있다. 통일부 제공
1992년 1월20일 정원식 당시 국무총리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문에 서명하고 있다. 통일부 제공

◆‘팀스피리트’ 재개 놓고 최종 결렬

 

1992년 10월부터는 사찰규정 논의에 팀스피리트 재개 문제가 본격적으로 떠올랐다. 10월 7∼8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연례안보협의회 이후 북한은 남한이 미국과 함께 북핵 개발 저지 공동대응책을 논의하고 팀스피리트 재개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며 반발했다. 그달 중순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위원접촉에서도 북측은 이 문제를 앞세웠고, 사찰규정 토의는 다시 뒤로 밀렸다.

 

11월 이후 핵통제공동위는 사찰규정을 논하는 자리라기보다 팀스피리트 철회 공방장에 가까워졌다. 11월27일 열린 제11차 회의에서 남한은 특별사찰을 포함한 사찰규정 채택과 제9차 남북고위급회담 전 상호핵사찰이 이뤄지면 1993년 팀스피리트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고 했다. 반면 북한은 11월 말까지 팀스피리트 철회를 통보하라고 요구했다. 12월10일 열린 제12차 회의에서도 논의는 사찰 방식보다 훈련 재개 철회 여부를 두고 공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양측은 외세·전쟁 책임 공방까지 벌였다. 1992년 12월17일 제13차 회의에서 공로명 남한 위원장은 김일성과 스탈린 사진이 함께 실린 신문 자료를 건넸다. 최우진 북한 대표가 자료를 거부하며 찢자 공 위원장은 “위대한 지도자 사진인데…찢습니까 왜!”라고 지적했고, 북한은 도발이라며 반발했다. 사찰규정 협상이 기술적 검증 논의를 넘어 정치적 정통성 싸움으로 번진 장면이다.

 

마지막 접촉에서 양측은 의제 순서조차 맞추지 못했다. 1993년 1월25일 판문점 남측 지역 평화의 집에서 열린 위원장접촉에서 공 위원장은 팀스피리트가 남북군사공동위원회 소관이라며 이를 이유로 핵통제공동위 논의를 멈추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해 팀스피리트 훈련 실시가 불가피하다고 밝히는 한편, 사찰규정 문안토의를 즉각 재개하자고 촉구했다. 최 북측 위원장은 팀스피리트 문제를 먼저 다뤄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결국 다음 접촉 일정도 잡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문서가 남북한이 북핵 문제를 양자협상으로 풀려고 시도한 초기 기록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정승훈 전 남북회담본부장은 남북한이 제시한 초안들이 사실상 처음 공개되는 자료라며, 회의록에는 거친 언사와 책상을 치는 장면까지 담겼다고 설명했다. 박용한 한국국방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1992년도 팀스피리트 중단이 폐지가 아니라 북한의 호응 여부에 따라 되돌릴 수 있는 조건부 중단이었다며, “요즘 표현으로는 스냅백 가능한 중단”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기록은 북핵 협상 초기에도 합의문보다 검증 설계가 훨씬 어려웠다는 점을 보여준다. 1991년 말 남북한은 비핵화 공동선언까지 만들었고, 1992년 3월에는 핵통제공동위도 출범시켰지만, ‘누가, 어디를, 어떻게’ 들여다볼지를 정하는 순간 협상은 멈췄다. 당시 북한 핵능력이 지금처럼 고도화되기 전이었음에도 사찰 대상과 방식, 주한미군, 한·미 연합훈련, IAEA 사찰이 한꺼번에 얽혔다. 북핵 고도화 이후 협상 재개론이 거론되는 현재에도 검증·사찰 설계가 최대 난제로 남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