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본투표용 투표용지 인쇄 기준을 낮춘 것은 선거 당일 투표권 보장이라는 선거관리의 근본 원칙과 어긋난 결정이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선관위는 본투표율 하락 추세와 잔여 투표용지를 둘러싼 부정선거 의혹 가능성 등을 이유로 인쇄 기준 하한선을 유권자 수의 60%에서 50%로 낮췄지만, 국제 선거관리 현장에서는 투표율 예측 실패와 투표소별 수요 편차, 배포·운송 차질 등을 전제로 충분한 투표용지 확보와 비상 대응 체계를 중시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선관위가 유권자의 투표 기회 보장보다 남는 투표용지를 둘러싼 의혹 관리와 조직 방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다.
30일 국제민주주의선거지원연구소(International IDEA)의 테레즈 피어스 라아넬라 선거절차 총괄은 세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투표율 예측 실패와 투표소별 수요 편차, 배포·운송 과정의 차질 등이 전 세계적으로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부르는 주요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지방선거처럼 여러 종류의 선거가 동시에 치러지고 지역별 사정이 다른 경우에는 오류와 지연 가능성이 더 커질 수 있다고도 했다. 후보자 이름 오류에 따른 재인쇄, 물류 창고나 차량 문제, 기상 악화 등도 선거 당일 투표용지 수급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로 꼽힌다.
이처럼 투표용지 부족은 선거관리 실무에서 사전에 위험요인으로 분류되는 대표적 사안이다. 국제IDEA의 ‘선거 위험: 내부 위험 요인 안내서’ 보고서에 따르면 선거 물품 공급 실패나 지연, 부실한 취급·보안, 투표 전후의 투명성 부족이 선거와 선거 결과의 진실성에 대한 인식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투표용지, 투표함 등 선거 물품이 충분한 수량으로 제작됐는지, 안전하게 보관됐는지, 운송 과정에서 적절히 보호됐는지, 배포 과정이 투명했는지 등을 위험평가 항목으로 제시하고 있다.
국제 실무기준은 투표용지의 인쇄량뿐 아니라 배포·보관·운송 체계까지 선거관리기관의 책임 범위로 본다. 라아넬라 총괄은 선거관리기관이 투표용지를 직접 인쇄하지 않더라도 투표용지 설계와 배포·보관이 효율적이고 안전하며 충분하게 이뤄지도록 할 책임이 있다고 설명했다. 운송과 배포를 민간 업체나 우편서비스 등에 맡기는 경우에도 투표용지가 민감한 선거 물품인 만큼 보안 절차와 계약 관리가 중요하다고 했다. 이는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단순히 인쇄 매수 문제가 아니라 물류 전 과정의 관리 문제라는 의미다.
국제 선거관리 현장에서는 선거 당일 발생할 수 있는 불확실성에 대비해 투표용지 공급·배부 체계를 보완하고 있다. 미국과 호주는 유권자가 투표소에서 신원 확인을 마친 뒤 해당 선거구에 맞는 투표용지를 즉석에서 출력하는 현장 인쇄 방식을 확대했다. 미국 애리조나주는 장비 고장에 따른 투표 지연을 막기 위해 예비 프린터와 스캐너를 배치하고 토너, 드럼 등 소모품의 사전 확보를 의무화했다.
호주는 지난해 3월 서호주 주 선거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한 뒤 독립 조사위원회를 출범시켜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을 검토했다. 조사위는 투표용지 잔여 수량과 유권자 대기 상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 방안 등을 권고했다. 독일 베를린은 2021년 선거 당시 투표용지 배송 지연과 배부 오류가 발생한 뒤 각 구역 거점마다 여분 용지를 분산 보관하고, 긴급 상황 때 경찰 호위 차량이나 헬기를 투입할 수 있는 비상대응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나이지리아도 GPS 기반 실시간 추적 기능을 도입해 투표용지와 선거 장비 운송 차량의 이동 경로와 도착 예정 시간을 관리하고 있다.
라아넬라 총괄은 선거관리 실패가 가져올 파장도 경고했다. 그는 “소셜미디어와 알고리즘, 결과를 흔들려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결합할 경우 사소한 결함도 과도한 파장을 낳을 수 있다”라며 “선거관리 기관이 이런 위기를 애초에 어떻게 피하는지, 또는 위기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관리하는지가 공공 신뢰가 유지될지, 아니면 무너질지를 가르는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국내에서도 이번 사안을 단순한 행정 착오가 아니라 선거권 침해 문제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헌법재판연구관 출신의 황도수 전 건국대 교수는 “법률상 선거권 침해 문제로 봐야 한다”며 “투표소에 나온 유권자 중 누구도 투표하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헌법상 직접선거 원칙의 기본 전제”라고 말했다.
다만 라아넬라 총괄은 선거 과정에 대한 신뢰 회복이 선거관리 기관만의 책임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향후 선거 절차가 제대로 작동하고 공정하다고 인식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가 함께 책임지는 접근이 중요하다”며 “정부의 다른 기관들은 선거관리기관이 충분한 자원과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언론과 정치권도 정치적 이익이나 조회수를 위해 실패를 불필요하게 증폭시키는 일을 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와 관련 7월1일 열리는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2차 기관보고에는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과 위철환 중앙선관위원장 직무대행 등 현직 중앙선거관리위원 8명이 모두 출석한다. 국조특위는 2일에는 개표소 봉쇄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잠실 올림픽공원과 송파구 선거관리위원회도 찾아 현장조사를 실시할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