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젖은 비비추가 손가락을 물어뜯으며
길 끝에서 들려오는 범종 소리를 세어봅니다
버려진 꽃상여들이 고양이를 싣고 찾아가는 곳
비비추는 담벼락 아래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벽은 벽에 낙서하지 않습니다
다리를 떨거나 멍하게 하늘을 보는 일도 하지 않습니다
비비추에겐 당신이 세상의 끝인데
벽은 그저 무던하고 성실하고 의젓합니다
가갸거겨를 배우고 후두둑 후두둑을 소리 내 적어보아도
물 먹은 벽의 심정을
뿌리까지 잠긴 화단의 심정을
비비추는 잘 전하지 못합니다
(하략)
비비추,라고 하면 먼저 그 무성한 푸른 잎이 떠오른다. 습하고 그늘진 곳에서도 잘 자라는 음지식물 비비추. 딱 요즘 같은 여름에 탐스러운 연보라색 꽃을 피운다는데….
시 속 비비추는 지금 비를 맞고 있다. 물에 젖은 비비추, 물에 젖은 벽. 오랜 시간 담벼락 아래 머문 비비추. 아무리 애를 써도 벽의 심정을 받아 적을 수 없어, 전할 수 없어 손가락만 물어뜯는 비비추. 순식간에 어스름이 내리깔린 골목과 골목 곳곳 탁한 빗물이 괸 웅덩이처럼 시는 쓸쓸해진다. 어디선가 무거운 범종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갑작스러운 기분은 아닐 것이다. 비비추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긴 시간 곁에 머물렀으나 결국 비비추는 비비추, 벽은 벽. 비비추에게 벽은 세상의 끝이지만, 단지 그뿐. 때가 되면 잎은 시들고, 마음이란 곧잘 지워져 버리는 엉성한 낙서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렇게 짐작하면서도 비의 계절이 오면 새삼 이런저런 얄궂은 기분에 휩싸이는 것이다.
박소란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