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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진의 선견지명] 용인 수지 ‘예진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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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 수지구청 앞 백설교 너머로 예진산이라는 이름의 야트막한 산(해발 135.8m)이 있다. 이 산자락에 빼곡히 들어선 아파트 대단지 터는 본래 임진왜란의 격전지로 알려져 있다. 그런 이유로 예진산(芮津山)이라는 지명에 대해서 “옛날 진터가 있는 산이라는 뜻에서 옛진산이라고 하다가 예진산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고 예진산 옆으로 신봉천과 성복천이 합류한 풍덕천이 탄천과 합류해서 한강으로 흘러드는 자연환경을 고려해서 “‘물가 예(芮)’와 ‘나루 진(津)’을 빌려 ‘물가 나루터’를 한자로 예진산(芮津山)으로 표기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지만 모두 믿기 어렵다.

한양과 부산을 잇는 요충지인 이곳 예진산은 왜군이 한양에 진입하기 위한 보루를 세운 곳이어서 임진산(壬辰山/壬陳山) 혹은 이진봉 등으로 호칭되어왔는데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일본 민족을 ‘예’라고 불러왔음을 상기하면 ‘예진산’이라는 지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용비어천가’(1447)에 이미 ‘왜’를 ‘예’라고 기록하고 있고 멀리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시대 향가에도 일본을 ‘왜’가 아니라 ‘예’의 이전형이라 할 수 있는 ‘여리’로 읽어야 하는 사례가 보이기도 한다. 이 산이 왜구들의 주둔지였다는 기록도 있다. ‘동국여지도(東國輿地誌)’ 용인편(龍仁縣)에는 “현의 서쪽 10리, 큰길 위 산기슭은 임진년 왜구가 잇달아 진을 치고 있던 곳이다(在縣西十里大路上山麓萬曆壬辰倭寇連營屯據處)”라고 되어 있어서 이곳이 임진란 때 왜군의 주둔지였음을 직접 증언하고 있다.

1997년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발견된 총통 2정과 인근에 왜골고개, 왜골(이현 남쪽 뜰), 군사들이 풍덩풍덩 빠져서 붙여졌다는 풍덕천의 지명 이야기 등도 이곳이 임진왜란 당시 치열했던 전쟁터였음과 민간에서는 이곳을 오랫동안 ‘예가 진을 친 산’으로 기억해 왔음을 말해 준다. 예진산 유적지에서 발견한 총통 복제품과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삼성물산이 전시관과 부지를 용인시에 기부채납해, 지역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공간으로 2002년에 개관한 ‘임진산성 유적전시관’은 지금은 찾는 사람이 없어 임시 창고로 쓰이고 있다.

한편 예진산과 연결된 소실봉(韶室峰 186.1m)이 품고 있는 보정동 뜰은 예진산에 진을 치고 신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 1600명에게 조선 농민군 6만명이 맥없이 무너져 버린 아픈 기억을 지닌 전투의 현장이었다.

전국에 ‘예’로 시작하는 지명 중에는 이런 식으로 민중이 겪은 뼈아픈 기억이 지명으로 남겨진 경우가 더 있을 것이다. 우리 지명 속에 남겨진 우리네 언어 경험에 좀더 ‘예’민해질 필요가 있다.
 

김양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