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돈, 거짓말, 신/캐서린 스튜어트/안효상 옮김/책과함께/2만8000원
민주주의는 총성과 함께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위험한 붕괴는 선거가 계속 치러지고, 법원이 존재하며, 언론도 살아 있는 듯 보이는 가운데 조용히 진행된다. 시민들은 투표하지만, 판단은 왜곡된 정보에 흔들리고, 종교는 신앙을 넘어 정치의 무기가 되며, 막대한 자본은 오랜 시간 제도를 안에서부터 바꿔 나간다.
미국의 탐사 저널리스트 캐서린 스튜어트의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돈, 거짓말, 신’은 이러한 민주주의의 ‘보이지 않는 붕괴’를 집요하게 추적한 탐사 르포다.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15년 넘게 취재해 온 저자는 전국 규모의 보수 정치 집회는 물론 지역 교회와 시민단체, 정치 콘퍼런스, 활동가들의 비공식 모임까지 직접 찾아다니며 수많은 관계자를 인터뷰했다. 정치학자의 이론서가 아니라 현장을 누빈 기자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높은 설득력을 지닌다.
책은 흔히 도널드 트럼프로 상징되는 미국 극우 정치의 부상을 한 정치인의 성공이나 포퓰리즘의 결과로만 해석하지 않는다. 저자는 “트럼프는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라고 단언한다. 중요한 것은 트럼프라는 인물보다 그를 가능하게 만든 사회적 토양과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정치 프로젝트다. 결국 이 책은 특정 정치인을 비판하는 데 머물지 않고 민주주의를 잠식해 온 권력의 설계도를 해부한다.
책 제목에 등장하는 세 단어, ‘돈’ ‘거짓말’ ‘신’은 저자가 미국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 축으로 지목한 요소들이다. 첫 번째는 돈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의 한 표가 같은 가치를 지닌다는 원칙 위에 서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저자는 거대 자본과 억만장자 후원자, 보수 재단, 정치행동위원회(PAC), 싱크탱크가 수십 년 동안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정치 지형을 바꿔 왔다고 분석한다. 이들의 목표는 단기적인 선거 승리가 아니라 법원과 교육, 지방정부, 언론, 시민단체를 장기적으로 재편하는 데 있었다. 선거는 시작일 뿐이며,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가치와 제도를 바꾸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보수 진영은 법률가를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연방판사 추천 과정에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교육위원회와 지역 학교 이사회 선거에 적극 참여했다. 정책 연구기관을 육성하고 지역 조직을 강화하는 장기 전략 역시 꾸준히 추진했다. 저자는 이러한 축적이 결국 특정 정치인의 등장을 가능하게 만든 사회적 기반이었다고 진단한다.
두 번째 축은 거짓말이다. 허위정보는 민주주의를 흔드는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다. 저자는 선거 부정 음모론과 각종 가짜뉴스가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믿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유통된다고 분석한다. 시민이 언론을 신뢰하지 않고 전문가를 의심하며 선거 결과마저 인정하지 않는 순간 민주주의의 토대는 무너진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이러한 현상을 더욱 가속화했다. 알고리즘은 분노와 혐오를 증폭시키고, 거짓은 사실보다 훨씬 빠르게 확산된다. 이는 단순한 정보 왜곡을 넘어 공적 토론 자체를 무력화한다.
세 번째는 신이다. 물론 저자가 비판하는 대상은 종교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종교를 정치권력의 도구로 활용하는 기독교 민족주의다. 특정 종교적 가치만을 국가 운영의 기준으로 삼고 정치적 충성을 신앙과 동일시하는 순간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다원주의는 설 자리를 잃는다. 정치적 경쟁자는 더 이상 의견이 다른 시민이 아니라 ‘신의 뜻을 거스르는 적’으로 규정되고, 타협은 배신이 되며 협치는 불가능해진다. 민주주의와 종교는 충분히 공존할 수 있지만 종교가 국가 권력을 독점하려 할 때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경고다.
책의 문제의식은 미국에만 머물지 않는다. 정치적 양극화와 혐오 정치, 음모론의 확산, 허위정보의 범람, 종교와 정치의 결합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리 사회 역시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가짜뉴스가 확산하고 진영 간 불신이 깊어지는 현실을 경험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방식은 국가마다 다를 수 있지만, 그 전조는 놀랄 만큼 닮았다는 사실을 책은 일깨운다.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은 의외로 평범하다. 공교육 강화와 정치자금의 투명성 확보, 허위정보 대응 체계 구축, 정교분리 원칙의 확립, 독립적인 사법부와 언론의 보호, 시민사회의 연대가 그것이다. 특별한 처방이라기보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다시 세우자는 제안이다.
결국 민주주의는 헌법이나 제도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시민의 신뢰와 참여, 사실에 근거한 공론장이 살아 있을 때 비로소 민주주의도 살아 움직인다. 이 책은 미국 정치를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가 어떻게 무너지고 또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