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른바 ‘우크라이나 반란군’(UPA)에 의해 희생된 폴란드 주민을 기리는 국가적 기념비를 세우기로 했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간의 과거사 갈등 심화가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를 위한 서방의 공조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11일(현지시간) BBC 방송에 따르면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이날 ‘볼히니아 대학살 희생자 추모일’을 맞아 행한 연설에서 “진실 규명은 피해자들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일인 동시에 고통스러운 과거를 극복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념비 건립 방침을 밝힌 투스크는 우크라이나를 겨냥해 “유럽연합(EU) 회원국이 되길 원한다면 과거사의 진실부터 직시하라”고 일갈했다. 우크라이나가 끝내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으면 폴란드가 나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을 저지할 수 있음을 내비친 셈이다.
EU는 현재 27개 회원국으로 구성돼 있으며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비회원국이 EU에 신규 가입을 하려면 기존 회원국 전체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문제의 볼히니아 지역은 옛 폴란드 영토 남동부에 있다. 2차대전 종전 이후 소련(현 러시아)은 동유럽 국경선을 재조정하며 볼히니아 땅을 폴란드에서 떼어내 당시만 해도 소련의 일부였던 우크라이나로 이관했다. 오늘날에도 독립국이 된 우크라이나 영토 일부인 볼린주(州)로 남아 있다.
2차대전 당시 그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1939년 2차대전 발발 직후 폴란드는 나치 독일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우크라이나 독립을 꿈꾸던 민족주의자들은 이 기회를 틈타 독일 점령 하의 폴란드 볼히니아 지역에 우크라이나 국가를 세우길 갈망했다. 일명 UPA로 불린 이들이 앞장섰다. 그들은 볼히니아에서 폴란드인들을 몰아내고자 잔인한 공격을 감행했다. 1943년 7∼8월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오늘날 폴란드 역사학계는 2차대전 기간 UPA의 공격에 목숨을 잃은 폴란드인이 총 1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한다.
전쟁 말기 나치 독일이 소련군에 밀려 쫓겨나며 이번에는 폴란드가 UPA 등 우크라이나인들을 상대로 보복에 나섰다. 학자들은 우크라이나인 약 1만명이 살해된 것으로 본다. UPA 참가자들은 우크라이나 역사에선 독립 투사요, 영웅 대접을 받는다.
종전 후 80년이 넘도록 제대로 된 진상 규명이 이뤄지지 않은 채 폴란드·우크라이나 양국 간의 미해결 과거사로 남아 있던 이 사안이 최근 수면 위로 부상했다. 2022년 2월부터 4년 넘게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자국 특수부대 명칭에 UPA를 넣은 것이 발단이 됐다.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해 온 폴란드는 “어떻게 우리한테 이럴 수 있느냐”고 분노를 터뜨렸다. 카롤 나브로츠키 폴란드 대통령은 지난 2023년 폴란드 정부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수여한 ‘흰독수리 훈장’을 박탈했다.
우크라이나는 폴란드가 이웃 나라 군대의 부대명까지 간섭할 권리는 없다는 입장이 확고하다. 젤렌스키는 이날 “우크라이나는 과거사 진실을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서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라는 공통의 위협에 직면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은 과거사 진상 규명보다는 러시아에 맞서 단결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