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LG반도체가 현대전자로 넘어가는 ‘반도체 빅딜’이 있었다. 현대전자 역시 1년 만에 자금난에 봉착, 2001년 10조원대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회사는 채권단으로 넘어가면서 하이닉스로 사명이 바뀌었다. 미국 마이크론에 매각될 뻔한 위기를 간신히 넘긴 2002년 3월 당시 주당 가격은 135원이었다. 말 그대로 껌값도 안 되는 ‘동전주’였다.
2012년 최태원 SK 회장이 승부수를 띄웠다. 인수 당시 연간 2200억원의 적자를 내던 천덕꾸러기였지만 최 회장은 모바일과 데이터 시대로의 반도체 지형변화를 읽었다. 그룹 내부 반대에도 “하이닉스엔 기술과 글로벌이라는 무기가 있다”며 3조4267억원에 하이닉스를 품었다. 2023년에는 연간 7조7303억원의 영업손실을 내면서 ‘승자의 저주’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쏟아졌지만, SK는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메모리는 호황기에 얼마나 버느냐만큼 불황기에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게 최 회장의 지론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여러 D램을 수직으로 연결하는 TSV(실리콘관통전극) 기술을 연구했다. 모두가 “무모하다”고 하던 고대역폭메모리(HBM)에 과감히 투자해 2013년 세계 최초로 개발에 성공했다. 하지만 10년 가까이 시장은 제조비용이 비싸다며 HBM을 외면했다. 반전은 극적으로 찾아왔다. 2023년 챗 GPT가 불러온 생성형 인공지능(AI) 열풍 속에서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로부터 HBM 독점공급을 따낸다. 최근에는 26년간 삼성전자가 지켜온 국내 시총 1위를 빼앗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SK하이닉스가 10일(현지 시간) 미 나스닥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미국주식예탁증서(ADR) 1억7790만주를 주당 149달러에 발행해 265억달러(40조원)를 조달한다. 미국에 상장한 외국 기업 중 2014년 중국 알리바바(250억달러, 38조원)를 뛰어넘는 최대 규모다. 미국 IPO 사상 최초로 기존 주가보다 높은 가격으로 공모하는 프리미엄 프라이싱도 달성했다. SK하이닉스 ADR은 상장 첫날 공모가 대비 13.08% 급등한 168.49달러에 마감했다. “기회는 늘 준비된 자에게 온다”는 말이 있다. SK하이닉스의 서사는 AI의 심장을 만들겠다는 집념과 투자가 만들어낸 한 편의 기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