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평 남짓한 작은 교실, 철민(15·가명)이가 친구 2명과 스피커에서 나오는 문장을 듣고 소리 내어 따라 읽고 있었다.
“제주도에 가면 한라산에 가보세요.”
유치원생이라도 어려울 게 없는 간단한 문장이다. 비슷한 수준의 것이 이어져 나왔다. 듣고, 따라 읽고 나면 중국어로 설명이 붙었다. 그제야 아이들은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듯했다.
지난 5월13일, 부산 강서구 장대현중고등학교에서 만난 세 아이는 한국의 유명 관광지를 소개하는 내용의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었다. 모두 제3국 출생 북한배경청소년이다. 북한이탈주민(탈북민) 엄마와 중국인 아빠 사이에서 중국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생활하다 부모를 따라 지난해 한국으로 들어와 한국말이 서툴다. 철민이가 그중에 나아 보이긴 했지만 한국말이 자연스러운 건 아니었다.
철민이는 중국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왔다. 중국에 있을 때 한국은 그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영상으로나 보던 나라였지 자기가 생활하게 될 곳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2013년 한국에 먼저 와 10년 넘게 떨어져 살던 엄마가 지난해 불러 느닷없이 한국 생활이 시작됐다. 가장 힘든 건 한국말이다. 하루 4시간 한국어 수업을 듣고는 있지만 “눈으로 보면 알겠는데 입을 떼는 게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입을 다물어 버리는 아이들이 있다. 한국 생활 8년 차 은정(18)이가 그랬다. 철민이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태어난 제3국 출생인 은정이는 막 입국한 2019년, 일반 초등학교에 4학년으로 입학했다. 학교생활의 모든 것이 한국어에서 시작하지만 은정이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입을 닫기로 했다. 긍정 혹은 부정을 나타내는 고갯짓만이 거의 유일하게 가능한 의사소통이었다.
이런 상황에 자존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 시절 은정이가 교실에서 사무치게 경험한 것은 열패감, 소외감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수업은 고역이었다. 한 명씩 수학 문제를 풀게 했던 선생님은 끝내 은정이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교과서를 돌아가며 읽는 수업에서는 긴장감에 항상 가슴이 쿵쾅거렸다. 혼자 읽지 못해 선생님이 읽는 걸 따라 해야 했던 게 “너무 쪽팔리는 일”이었다.
세계일보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북한·제3국 출생 북한배경청소년(92명)에게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힘들었던 점을 물었더니 ‘말투와 언어 표현’을 꼽은 이들이 66명(71.7%)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북한 출생 학생들은 특유의 억양, 사용하는 단어의 차이 등에서 상당한 스트레스를 느낀다. 철민이, 은정이가 경험한 ‘한국어 장벽’이 일반적으로 겪는 문제라는 점을 보여주는 결과다. ‘새로운 환경 적응’(39명·42.4%), ‘학교 공부’(38명·41.3%)도 높은 비중을 차지했는데, 한국어가 서툴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어려움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한국어 습득력은 어른에 비해 훨씬 뛰어나다. 탈북민이나 지원기관 관계자들이 ‘정착은 나이순’이라고 흔히 말하는 이유다. 한국에 오는 나이가 어릴수록 빨리 한국어를 익히고, 그만큼 적응도 수월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북한배경학생들의 한국어 습득을 뒷받침하는 교육 시스템이 중요하다. 일상적 대화가 가능해지도록 돕는 게 우선이고 수업을 이해하고, 공부를 할 정도로 한국어 실력을 키우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일상 대화’와 ‘수업 이해·학업수행’에 필요한 한국어는 수준이 전혀 다르다. 철민이는 좋아하는 과목인 세계사와 지리 교과서를 아직 읽을 수 없다. 한국사 수업은 급한 대로 중국어책으로 보충하는 상황이다. 은정이는 2∼3년이 지나 한국어에 익숙해졌지만 수업을 이해하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 또래 학생에 비해 한참 늦은 진도를 차근차근 따라가겠다는 생각에 북한배경학생들이 다니는 대안학교 반석학교로 옮겼고, 지금은 대학입시를 준비 중이다.
중요한 것은 한국어 습득을 돕는 시스템의 구축이다. 이런 점에서 주목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대안학교다. 장대현중고등학교의 경우 재학 중인 북한배경학생 17명 중 제3국 출생은 7명이고, 교사 대 학생 비율은 2대 1 정도다. 언어 교육이나 한국생활 적응을 위한 맞춤형 지도가 가능한 구조다. 또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한국어 사용을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있어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던 아이들도 대개 1년 정도 지나면 일상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
문제는 이런 체계를 제대로 갖춘 학교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제3국 출생을 포함한 대부분의 북한배경학생은 일반학교에 재학하고 있다. 그런데 일반학교 상당수가 북한배경학생에 대한 이해나 지도 경험이 부족하다. 학생을 지도해야 하는 교사부터가 그렇다. 한국교육개발원(KEDI)이 2024년 발표한 ‘국내 출생 북한배경학생 교육 실태 연구’에 따르면 일반학교에서 북한배경학생을 맡고 있는 담임교사의 72%는 북한배경학생을 처음 접했다고 응답했다. 북한배경학생 교육 관련 연수 경험이 있는 교사는 초등학교 25.1%, 중학교 20.2%, 고등학교 19.0%에 그쳤다.
한국어 장벽이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또 하나의 영역이 가족, 친구 등 주변 사람들과 관계 맺기다.
철민이의 경우 엄마와의 의사소통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다. 고민이 생기면 누구에게 이야기하느냐는 물음에 철민이는 주저 없이 “엄마”라고 답했다. 두 마디 짧은 대답을 하며 떠오른 표정과 말투에 엄마를 생각한 것이 분명한 애틋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북한 출신인 엄마는 철민이만큼 중국어가 능숙지 않다.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철민이는 엄마만큼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한다.
“엄마는 중국어를 잘 못 해요. 엄마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아요. 그리고 어떤 건 저도 한국어로 말을 못하겠어요.”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인 엄마와 아들 사이에는 언어란 벽이 있다.
KEDI의 같은 보고서에 따르면, 대안학교에 다니는 제3국 출생 학생들의 가정 내 언어 환경은 한국어 소통에 문제가 없는 국내 및 북한 출생 학생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국내·북한 출생 학생 가정의 경우 대부분 한국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제3국 출생 학생의 가정은 달랐다. 대안학교에 재학 중인 북한배경 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를 보면 아버지의 사용 언어는 중국어가 66.7%, 한국어가 25.0%였다. 어머니의 경우엔 각각 17.2%, 79.3%였다. 가족 간에 대화를 나눌 때 사용하는 언어는 한국어(45.2%)와 중국어(48.4%)가 비슷한 비율로 나타났다. 북한배경 고등학생들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것으로 조사됐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 익숙한 언어가 달라 가정 안에서도 원활한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