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 내에 메모리 반도체 생산시설을 지어야 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양사가 고심에 빠졌다. 경기 용인에 이어 호남에도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위해 천문학적인 투자 계획을 밝힌 상황에서 미국 정부의 요구를 따를 경우 부담이 만만찮고, 무시하자니 관세 보복 등에 시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러트닉 장관은 지난 9일(현지시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쟁사인 마이크론이 미국 뉴욕주 클레이 타운에 건설 중인 팹(반도체 생산공장)의 콘크리트 타설 기념식 현장에서 “나는 경쟁사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미국으로 불러와 생산시설을 짓게 하고 싶다”며 “마이크론이 앞장서고 있으니 경쟁자들은 질투심을 느낄 것이고 결국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의 미국 내 입지 확대를 마이크론이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역시 미국에 팹을 짓도록 촉구한 것이다. 그는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지만 양사와 관련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러트닉 장관의 발언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 내 추진 중인 투자보다 훨씬 큰 규모의 추가 투자를 하도록 압박하는 모양새다. 양사는 일단 공식적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다. 다만,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이튿날 뉴욕에서 열린 SK하이닉스 ADR 상장 기념행사에서 미 CNBC와 인터뷰를 통해 “전력·용수·인력·공급망 등 여건이 갖춰질 경우 메모리 생산공장 건설도 가능하다”며 미국 현지 팹 조성 가능성을 열어뒀다. 하지만 미국 내 팹 투자가 현실화할 경우 양사는 많은 부담을 안아야 한다. 미국은 인건비·건설비가 높고 소재·부품·장비 협력사 생태계도 얇아 같은 팹이라도 국내보다 훨씬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든다. 게다가 양사는 국내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에만 수천조원을 투입하기로 해 추가 투자 여력이 부족하다. 미국에 새 팹을 짓게 되면 국내 투자 일정 조정과 차질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양사가 그동안 미국 투자를 소홀히 한 것도 아니다. 삼성전자 2021년부터 만들어온 텍사스 테일러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은 양산을 앞두고 있다. SK하이닉스도 인디애나 웨스트라피엣에 고대역폭 메모리(HBM) 패키징 공장을 지어 2028년 가동하는 게 목표다.
하지만 러트닉 장관의 요구는 성격이 다르다. 패키징·파운드리가 아니라 메모리 전공정 생산시설을 미국에 지으라는 의미여서다. 인공지능(AI) 메모리 슈퍼사이클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생산능력 자체가 경쟁력이 되는 만큼 메모리 공급망까지 미국으로 끌어오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반도체 수익의 대부분을 엔비디아와 구글, 오픈AI 등 미국 빅테크(거대기술기업)들에서 벌어들이는 것도 감안한 요구로 분석된다. 반도체 관세를 15%로 낮춰준 대만 TSMC의 경우, 미국 총투자규모는 1650억달러로 현재 삼성전자가 투자한 파운드리 공장(370억달러)의 4배를 넘어선다.
그러나 국가전략 산업인 반도체의 핵심 생산기지를 해외에 구축하는 것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게 또 다른 부담이다. 양사가 과거 비용 절감을 위해 중국에 일부 메모리 생산기지를 두면서도 핵심 메모리 공장만은 한국에 둔 이유다. 그렇다고 미국 정부의 압박을 무시할 수도 없는 만큼 양사의 고민은 깊어질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