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메뉴 보기 검색

[안보윤의어느날] 당신이 말하는 사이

입력 :
폰트 크게 폰트 작게

분리해 둔 재활용품을 잔뜩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나름대로 씻고 말리고 털어낸 것들인데도 혹시 냄새가 나진 않을까 긴장하고 있는데, 노인과 초등학생 아이 하나가 금세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재활용품이 든 상자를 끌어안고 벽에 바짝 붙은 내가 무색할 정도로 두 사람은 열심히 대화 중이었다. 대부분 노인이 묻고 아이가 대답하는 식이었는데, 대충 들어보니 노인 집에 놀러온 아이가 집에 돌아가는 길인 듯했다. 부모가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빼러 먼저 내려가고 노인이 아이를 배웅하면서 이것저것 묻는 모양새였다.

“그러니까 수업은 알아들을 수 있다는 거지?” 아이가 둥글고 통통한 얼굴을 노인을 향해 들어 올렸다. 체구는 작지 않지만 젖살이 오른 앳된 뺨이 영락없이 어린아이였다. “수업은 전부 영어로 하는 거야?” “네, 다는 아닌데 알아들을 수 있어요.” “그럼 애들하고도 영어로 말해?” “수업 중에는 영어로 하고 수업 끝나고 나면 한국어로 해요.” 그러면, 그러면, 하고 노인은 조급하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엘리베이터 숫자가 뚝뚝 떨어질 때마다 조바심이 이는 듯했다.

국제학교 학생인가? 아니면 영어캠프 같은 걸 말하는 건가? 나는 손에서 자꾸 미끄러지는 상자를 떨어뜨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가만 보니 노인은 명절 때마다 손주들에게 이것저것 묻는 내 부모의 모습과 비슷했다. 학교생활 잘하니? 친구들이랑은 사이좋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 대체로 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지만 그래도 관심을 보이려 노력하던 몇몇 틀에 박힌 질문들이 떠올랐다.

“근데 러시아랑 인도에서 온 친구들이랑은 수업 끝나고도 영어로 얘기해요.” 아이의 말에 역시 국제학교인가 생각할 즈음 노인이 물었다. “걔들은 못 사는 애들 아냐? 발음도 안 좋지?”

나도 모르게 노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작은 체구에 적당히 마르고 적당히 구부러진 몸, 익숙한 컬을 넣은 회백색 머리카락과 아이를 향해 조금 튀어나온 입.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통의 노인이었다. “미국 애들하고 놀아, 하얀 애들.” 당연한 듯 내뱉어진 노인의 말에 나는 바닥을 살폈다. 재활용품을 담은 상자는 분명 내가 꽉 붙들고 있는데도 뭔가 많은 것들이 바닥에 쏟아져 내린 기분이었다. 메마르고 강퍅한 소리를 내며 찌그러진 캔 같은 것들이 우르르 우르르.

아이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걔들도 발음 괜찮은데요? 인도 애는 원래도 영어 썼다고 했어요.” 마침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고 나는 여러 번 바닥을 살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대화에 심취한 채 내린 그들이 아이고, 지하로 가야 되는데 그냥 내려 버렸네, 하며 호들갑을 떠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재활용장으로 향했다. 불쾌하고 울적한 기분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는 사이 당연스럽게 배어 나온 편견과 비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을 묻는 다정한 대화 속에서 불현듯 튀어나오는 혐오의 그림자를 아이가 어떻게 피하면서 자랄 수 있을까. 마대자루 속에 던져넣은 캔들이 저들끼리 부딪치며 우르르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보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