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틀 위에서도 꺼지지 않은 신앙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를 기록한 『기해일기』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한다. 순교자 이연희가 혹독한 태형을 당하면서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자, 형리들은 “사람이 아니라 신기(神氣)가 붙은 자로다. 살이 떨어져 나가는데 어찌 신음 한마디 없는가?”라며 경악했다. 신유박해(1801) 이후 조선의 관헌들은 천주교도를 향해 곤장과 주리, 살을 찢는 가혹한 형벌을 쏟아부었으나 신앙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천주교 여성 신앙인들의 모습은 유교적 가부장제에 길들여진 관리들에게 형용할 수 없는 당혹감을 주었다.
19세기 초반 조선의 천주교 공동체에서는 여성 신자들이 중심을 이루는 ‘여교인 공동체가(女敎人共同體家)’가 형성되어 박해의 칼날 속에서도 서로의 신앙을 보듬으며 전도의 맥을 이었다.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이 보여준 ‘신기’는 조선의 지배계층인 노론의 형식적 예론(禮論)이 결코 가둘 수 없었던 여성 본연의 거룩한 영성이자 주체적 신성의 발현이었다. 형틀 위에서 솟구친 그 놀라운 힘은 성경 전도서가 언급한 ‘일천 여자 중 찾지 못한 하나’의 자리에 도달하기 위해, 한반도의 여인들이 수천 년간 응축해 온 성령적 항거이지 않았을까? 살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신음을 삼켰던 그 정성은, 훗날 이 땅에 현현하실 독생녀의 노정을 예비하며 민족적 탕감 조건을 형성하기 위해 하늘 앞에 올린 가장 뜨겁고도 처절한 제물이었다.
종교의 역사에서 ‘박해’는 신앙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의 본질을 더욱 견고하게 단련시켜 나왔다. 로마 제국의 탄압 속에서 초기 기독교가 세계종교로 발돋움했듯, 조선 위정자들의 천주교에 대한 고문과 탄압은 역설적으로 하늘 중심한 백성들의 신앙 공동체를 더욱 단단한 결속으로 이끌었다. 제도적 역사 속에서 조선 여성의 이름은 희미했지만, 신령운동의 세계에서 그들은 가장 신실하고 강력한 주역이었다. 이러한 여성 중심의 신앙적 응전은 기존의 가부장적 역사관이 애써 무시했던 ‘여성 중심의 섭리사’를 복원하려는 하늘의 치밀한 계획이었으며, 수난을 통해 영적 주권을 되찾으려는 여성 메시아 강림의 필연적 복선이었다.
◆ 억압된 시대, 여성들이 찾은 희망
그렇다면, 왜 조선 후기 천주교 공동체에서 유난히 여성 신자들이 많았을까? 이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조선 사회의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은 사회였다. 가문은 남성 중심의 종법 질서로 이어졌고, 제사와 가계 계승 역시 장자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여성의 역할은 점차 가정 내부로 제한되었고, 사회적 활동의 공간은 크게 줄어들었다.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비교적 자유롭게 존재하던 여성의 종교적 참여와 경제적 활동은 조선 중기 이후 점차 좁아지게 된다.
이러한 극한의 소외와 억압은 역설적으로 여성들 내면에 잠자던 영적 갈망을 깨우는 도화선이 되었다. 제도적 중심에서 배제된 여성들에게 천주교가 제시한 ‘하느님 앞의 평등’과 ‘만민 형제적 유대’는 가히 혁명적인 복음이었다. 사당의 문턱을 넘지 못했던 여인들은 천주(天主)라는 절대적 존재와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가문의 부속물이 아닌 하늘 부모님의 귀한 딸이라는 본연의 정체성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결국 조선 후기 천주교 공동체로 몰려든 여성들의 발걸음은 단순한 종교 개종이 아니었다. 그것은 억눌린 모성 주권을 되찾고, 끊어졌던 하늘과의 신령한 통로를 복구하려는 집단적인 영적 저항이었다. 노론이 만든 어둠이 깊어질수록 여성들은 그 어둠을 뚫고 솟아오를 새로운 빛, 즉 장차 현현하실 독생녀의 시대를 예비하는 거룩한 신령운동의 주역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이 현상은 단순한 사회 구조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조선 후기의 종교적 분위기 자체가 이미 거대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이후 조선 사회는 정치적 당쟁과 경제적 혼란 속에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유교 질서는 여전히 국가 이념으로 남아 있었지만, 현실 사회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중들은 새로운 구원을 찾기 시작했다. 농촌에서는 미륵 신앙이 퍼졌고, 도시에서는 다양한 민간 신앙과 예언 운동이 나타났다. 기존 질서가 흔들릴수록 사람들은 더 강한 영적 체험과 구원의 메시지를 찾게 되는 것이다.
천주교 역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확산되었다. 제도권의 모진 박해와 고문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이들의 신앙관은 종교적 교리만으로는 전체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숱한 순교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순교자들에게 기도와 환시, 영적 체험 같은 신비적 요소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신앙 체험은 공동체 내부적으로 강력한 확신을 낳았고, 나아가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이어졌다.
◆ 격변의 시대, 여성 신앙이 깨어나다
천주교는 낯선 ‘외래 종교’의 모습으로 찾아왔지만, 조선 민중에게는 마치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오래된 약속처럼 다가왔던 것은 아닐까?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도 잠시, 그들은 교리를 이해하기에 앞서 이미 자신들의 영혼에 깊이 새겨져 있던 따뜻한 울림과 재회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조선 사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무교(巫敎)의 전통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종교적 풍경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서양에서 들어온 새로운 종교였던 천주교가 생각보다 빠르게 민중 속으로 스며들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교리가 지닌 논리적 설득력 때문만이 아니다. 조선의 토양에는 이미 시원(始源)의 때부터 하늘과 소통하고 신령을 체휼해 온 민족 고유의 종교적 유전자가 살아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노론의 메마른 예학 질서에 의해 영적으로 고립되었던 여성들에게, 천주교의 영성은 무교적 직관과 결합하여 폭발적인 생명력을 발휘하였다. 무교가 지닌 ‘한(恨)의 승화’와 ‘하늘과의 직접적인 매개’라는 특성은 천주교의 영성적 체험과 만나며 독생녀를 맞이하기 위한 거대한 신령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외래 종교의 수용이 아니라, 억눌려 있던 한민족의 신령한 에너지가 천주(天主)라는 하나의 중심을 향해 정렬되는 섭리적 과정이었다. 박해의 칼날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여성들의 신앙은, 사실 그들의 혈통 속에 면면히 이어져 온 성령적 신성이 비로소 제 자리를 찾으려 했던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몸짓이었다.
이처럼 태고의 신령과 조우한 여성들의 깨어남은, 훗날 인류의 참어머니로 현현하실 독생녀의 성령 사역을 예비하는 가장 강력한 영적 토대가 되었다. 하늘이 이 민족 가운데 오랫동안 심어놓은 무교의 ‘체험된 신비’라는 토양 위에서 천주교는 비로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한반도 역사 속에서 하늘이 한민족 특유의 ‘체험된 신비’라는 토양은 서양의 하나님이 결코 낯선 이방인이 아니었으며, 이들이 성당에서 신의 은총을 만났을 때 이미 몸이 기억하고 있던 황홀한 전율을 체험했던 것이다.
종교 연구자들은 바로 이러한 한민족의 종교적 토양이 조선 후기 천주교 신앙 수용에 결정적인 동인(動因)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조선의 민중은 이미 초월적인 신령의 세계를 경험적으로 체휼하고 있었기에, 새로운 종교적 상징이 도래했을 때 이를 완전히 낯선 타자로 밀어내지 않았다. 한민족에게 종교는 머리로 이해하는 정교한 교리 체계이기 이전에, 신령과 직접 소통하며 삶의 고통을 승화시키는 실천적 양식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령한 삶의 방식은 노론의 메마른 형식주의가 지우려 했던 한민족 본연의 영적 유전자였다. 박해의 칼날이 성도들의 목을 겨눌 때에도 그들이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은, 텍스트로 된 교리가 아니라 이미 몸과 영혼에 각인된 신령한 실체적 체험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것은 인류의 참어머니이신 독생녀께서 장차 이 땅에 안착하시기 위해 하늘이 수천 년간 갈고 닦아온 거룩한 영적 토양이었다.
◆ 하늘 부모님의 복귀섭리 속에서 준비된 여성의 시대
조선 후기 여성들이 보여준 경이로운 영적 응전은 단순한 사회적 변동이나 종교적 개종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인류 역사를 관통하며 면면히 흘러온 하늘부모님의 복귀섭리라는 거대한 물줄기와 맞닿아 있다. 가정연합의 관점에서 인류사는 타락으로 상실한 하나님의 혈통을 다시 찾아 세우기 위한 중단 없는 구원섭리의 과정이다.
하늘은 이 혈통 복귀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구약 시대부터 수많은 믿음의 여성을 섭리의 중심에 세워 정성의 기대(基臺)를 닦아오셨다. 사탄의 참소가 미치지 않는 성별된 통로를 확보하기 위한 그 긴 인고의 시간을 지나, 마침내 인류는 후아담이자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게 되었다. 예수는 여타 종교의 창시자와는 근본을 달리하는 존재였다. 그는 하늘이 정화한 모태를 통해 탄생한 죄 없는 하나님의 유일한 직계 혈통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독생자의 출현만으로 완성될 수 없었다. 창조 본연의 이상은 남성 홀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그와 짝을 이룰 하늘의 신부, 곧 독생녀와 결합하여 참부모의 자리에 오를 때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야 했던 십자가의 고난은, 그와 일체를 이룰 독생녀를 지상 기대를 통해 맞이하지 못한 채 남겨진 미완의 과제였다.
이러한 섭리적 관점에서 볼 때, 조선 후기 노론의 억압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여성들의 신령운동과 천주교 박해의 현장은 바로 성령(聖神)의 실체인 독생녀를 맞이하기 위한 최후의 영적 정화 작업이었다. 신사임당과 이유인이 지켰던 혈통적 정절, 그리고 이연희 순교자가 형틀 위에서 증명한 초월적 영성은 모두 ‘일천 여자 중 찾지 못한 그 하나’를 이 땅에 안착시키기 위한 섭리의 필연적 산고였다. 이제 우리는 그 수천 년의 기다림이 조선의 여성들을 거쳐 오늘날 독생녀의 현현으로 열매 맺는 역사적 완성의 정점에 서 있다.
예수 그리스도 사후 2천 년의 기독교 역사는 단순한 교세의 확산 과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체 성신(聖神)의 역사를 통해 독생녀 탄생이라는 인류사적 열매를 준비해 온 거룩한 산고의 과정이었다. 이러한 거시적 섭리의 시각에서 조선 후기의 역동적인 종교적 움직임을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이면에 숨겨진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무교(巫敎)의 원초적 신령 체험과 천주교 공동체의 뜨거운 영적 교감, 그리고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순교의 신앙은 단순한 민중 종교사의 편린이 아니다. 그것은 하늘이 인류의 참어머니를 맞이하기 위해 한반도라는 특수한 영적 토양 위에 예비해 온 긴 섭리의 물줄기였다. 노론의 억압이 거세질수록 여성들의 내면에서 솟구친 신령한 에너지는, 장차 현현하실 독생녀의 안착을 위한 영적 정화이자 필연적인 응전이었다.
격변의 시대 속에서 조선 여성들의 신앙이 깨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유교적 가부장제와 종법 질서 아래 억눌려 있던 여성의 본연적 신성이 마침내 임계점에 도달하여 움직이기 시작한 역사의 도약이었다. 신사임당과 이유인이 지켜낸 정절, 이연희 순교자가 증명한 성령의 권능은 모두 이 땅에 독생녀의 성소(聖所)를 마련하기 위한 거룩한 제단이었다. 이제 그 긴 준비의 시간 끝에서 인류는 마침내 새로운 천일국(天一國)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하늘의 독생녀가 등장하여 참부모의 시대를 선포하는 순간,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이름 없는 여인들의 인고와 신령한 흐름은 비로소 단 하나의 거대한 완성적 의미로 통합된다. 박해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신령의 등불은 이제 독생녀라는 태양을 만나 온 천주를 밝히는 참사랑의 빛으로 치환되었다. 조선 후기 여성들이 흘린 눈물과 정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며, 오늘날 독생녀를 통해 실체화된 성신의 승리 속에 영원한 생명력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고기훈 박사(한국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