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지난달 29일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를 열고 서남권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각각 2기씩, 모두 4기의 신규 반도체 팹(공장) 구축 계획을 발표했다. 이어 지난 6일에는 광주 군공항 부지를 관련 산업단지 입지로 확정했다.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이들 4기 구축에 필요하다고 제시한 전력은 6.3GW(기가와트), 용수는 하루 65만t 규모로, 이는 대형 원자력발전 4~5기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단순 계산으로도 팹 1기당 최대 1.5GW 수준의 전력을 사용하는 셈이다. 여기에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와 첨단 제조시설까지 추가된다면 전력 수요는 훨씬 빠른 속도로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 이번 프로젝트에 대규모 전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이슈가 주요한 성공 관건으로 떠오르고 있는 이유다.
반도체 산업에서 필수로 요구되는 것은 전력의 양만이 아니다. 이미 전 세계 공급망 시장에선 전력 사용량뿐 아니라 그 출처까지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로 주요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은 공급망 전반의 재생에너지 사용 확대 목표를 잇달아 제시하고 있으며, 국내 반도체 산업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RE100(전략 재생에너지 사용)이 환경경영 차원의 선택이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 참여를 위한 필수 조건이 된 셈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충분한 전력량 확보뿐 아니라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은 공급망 확보라는 이중 과제를 안게 됐다.
더 큰 문제는 국내 재생에너지 공급 속도가 이러한 수요 증가를 충분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꾸준히 상승하고 있지만, 주요 선진국과 비교하면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다만 서남권 산업단지가 위치할 광주·전남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전국 최대 수준의 태양광 발전 기반을 보유하고 있으며, 해상풍력 잠재력 역시 국내 최고 수준으로 평가된다. 정부 역시 이러한 입지적 강점을 바탕으로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 수요를 뒷받침하겠다는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전 세계 움직임은 이러한 흐름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대만의 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TSMC는 RE100 목표 시점을 기존 2050년에서 2040년으로 앞당겼으며,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중 60% 달성을 추진하고 있다. 인텔(Intel Corporation)은 전 세계 사업장 기준 재생에너지 사용률을 사실상 100%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반면 국내 반도체업계의 재생에너지 전환 속도는 상대적으로 완만한 편이다. 삼성전자 DS 부문의 재생에너지 사용 비중은 최근 소폭 상승하는 데 그쳤고, SK하이닉스 역시 국제적인 선도 기업과 비교하면 아직 일정 수준의 격차를 보인다.
재생에너지 확대는 반도체 팹 건설과 별개로 진행되는 문제가 아니라 같은 속도로 함께 나가야 할 것이다. 태양광과 풍력은 기상 조건에 따라 발전량이 달라지는 간헐성이 취약점으로 지목된다. 이에 반해 반도체 팹은 순간적인 전력 공급 차질조차 대규모 손실로 이어질 수 있는 24시간 연속 가동 시설이다. 팹이 늘어나는 만큼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와 기술, 전력망, 에너지저장장치(ESS)도 같은 속도로 확충돼야 안정적인 공급을 기대할 수 있다.
실제로 대만은 탈원전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동안 재생에너지와 관련 전력망 확충이 TSMC·AI 서버 기업의 수요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대만은 2017년부터 정책을 본격 시행해 지난해 5월 마지막 원전을 멈춰 세웠지만, TSMC와 AI 서버 기업 폭스콘 등의 전력 수요 폭증과 액화천연가스(LNG) 조달 차질이 겹치면서 10개월 만에 원전 재가동을 추진하게 됐다. 이에 대만전력공사는 마안산 원전의 재가동 제안서를 원자력안전위원회에 제출했고, 라이칭더 총통은 전력 정책 결정에 AI 관련 수요를 고려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국제 사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우리 정부는 재생에너지와 원전, LNG, ESS 활용을 병행하겠다는 방침을 밝히고 있으며, 지난 8일에는 한국전력공사와 함께 전력망 적기 건설을 위한 태스크포스(TF)도 출범시켰다.
원전과 LNG 발전이 전력 공급의 안정성을 보완할 수는 있어도 국제 공급망이 요구하는 RE100 조건 자체를 채워주지는 못한다. RE100은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만 인정 기준으로 삼고 있어 아무리 무탄소 전력원이라 해도 원전은 이를 충족시킬 수 없다. 원전과 같은 안정적인 기저 전력원 확보가 별도로 필요하고, 국제 공급망 편입이라는 관문을 통과하려면 재생에너지 자체의 절대량 확대도 빠뜨릴 수 없는 전제 조건인 셈이다.
향후 얼마나 많은 반도체 공장을 확보하느냐보다 이를 뒷받침할 전력을 얼마나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공급할 수 있느냐가 전 세계 산업의 경쟁력으로 평가받을 가능성이 크다. 첨단 제조업의 경쟁력이 제조 역량뿐 아니라 에너지 인프라와 직결되는 시대가 본격화되고 있는 만큼 전력망 구축과 재생에너지 확대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가 앞으로의 핵심 과제로 대두했다.
선정민 UN SDGs 협회 전임 연구원 unsdgs.jeongmin@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