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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쿠, 17글자가 남기는 긴 울림…말을 덜어낼수록 세계는 더 선명해진다

“짧아서 쉬운 시”라는 오해만큼 하이쿠를 잘못 이해하게 만드는 말도 드물다. 하이쿠는 가장 적은 말로 가장 넓은 세계를 담아내는 문학이다. 단 17음절 안에 계절과 자연, 인간의 감각과 삶의 철학을 응축한다. 한 줄의 설명도 없지만 한 편의 소설보다 긴 여운을 남긴다.

 

‘하이쿠, 바쇼에서 시키까지’ 는 이런 하이쿠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책이다. 시인이자 일본문학 연구자인 오석륜 인덕대 교수가 일본 하이쿠의 두 거장인 마쓰오 바쇼와 마사오카 시키의 작품 135편을 엄선해 우리말 번역과 함께 소개하고, 작품마다 시대적 배경과 계절어, 표현 기법 등을 친절하게 해설했다. 단순한 번역 시집이 아니라 하이쿠를 읽는 방법까지 안내하는 입문서이자 감상의 길잡이다.

 

하이쿠, 바쇼에서 시키까지/ 오석륜/푸른길/1만4000원
하이쿠, 바쇼에서 시키까지/ 오석륜/푸른길/1만4000원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설명보다 체험’에 있다. 하이쿠가 무엇인지 장황하게 정의하기보다 작품 자체가 독자를 설득한다.

 

시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다음 작품은 그 좋은 예다.

 

아귀가 입을/벌리고 있는데/싸라기눈 뛰어드네

(鮟鱇の口あけて居る霰かな)

겨울 어물전. 커다란 입을 벌린 채 매달린 아귀와 하늘에서 떨어지는 싸라기눈. 아무 일도 아닌 풍경이지만 시키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는다. 싸라기눈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처럼 아귀의 입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단 세 줄이지만 정지된 풍경이 아니라 영화의 한 장면처럼 움직인다. 이 작품에는 감상도 교훈도 없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순간을 포착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시키가 추구했던 ‘사생(寫生)’ 정신이다. 현실을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태도. 독자는 그 빈 곳에서 저마다 다른 상상과 감정을 완성한다.

 

감을 먹으니/종이 울리는구나/호오류우지

(柿くへば鐘が鳴るなり法隆寺)

나라의 고찰 호오류우지를 둘러본 뒤 찻집에서 감을 먹던 시키에게 절에서 종소리가 들려온다. 그 순간의 가을 풍경이 그대로 시가 된다. 감의 선명한 주황빛과 달콤한 맛, 멀리서 울려오는 종소리, 고찰의 고요함이 세 줄 안에 응축된다. 시각과 미각, 청각이 동시에 살아나는 놀라운 감각의 시다. 설명은 없다. 그러나 독자는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을 한다.

 

이처럼 시키는 관념보다 현실을, 해석보다 관찰을 선택했다. 흔히 “바쇼가 하이쿠를 예술로 만들었고, 시키가 근대문학으로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내에서는 바쇼의 이름이 훨씬 익숙하다. ‘오래된 연못’이나 ‘개구리’ 하이쿠는 여러 번 번역돼 소개됐지만, 시키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시키의 문학세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했다는 점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저자는 두 거장의 차이를 어렵게 설명하지 않는다. 작품을 따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미학의 차이가 드러난다. 그래서 하이쿠를 처음 접하는 독자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이 책이 오늘날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따로 있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 속에서 살아간다. SNS에는 하루에도 수억 개의 문장이 쏟아지고, 설명은 길어질수록 설득력이 있다고 믿는다. 감정도 과잉이고 정보도 과잉이다. 그러나 정작 오래 기억되는 문장은 많지 않다.

 

하이쿠는 정반대의 길을 간다. 최대한 덜어내고, 독자의 몫을 남겨둔다. 말하지 않는 공간이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품는다. 그래서 하이쿠를 읽는 일은 단순히 시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춰 자연을 바라보고 자신의 감각을 회복하는 시간이 된다. 일종의 명상과도 같다.

 

저자는 하이쿠를 단순한 일본의 전통 시가로 한정하지 않는다. 동아시아 미학의 중요한 뿌리로 바라보며 우리 시조와 현대시, 최근 주목받는 디카시와도 충분히 공명할 수 있는 문학적 가능성을 제시한다. 짧은 형식 안에서 긴 울림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서로 닿아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하이쿠는 읽는 데 10초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한 편의 여운은 온종일, 때로는 평생 남기도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