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차례에 걸쳐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1970∼1980년대 영국 축구의 한 시대를 풍미한 케빈 키건이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0일(현지시간) AP통신과 영국 일간 가디언 등에 따르면 키건의 가족은 성명을 통해 그가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키건은 부인과 두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한 것으로 전해졌다. 키건의 암 진단 사실은 지난 1월 처음 알려졌다. 그는 지난달 공개 행사에서 교통사고 이후 수술을 준비하며 받은 검사에서 암이 발견됐으며, 다른 부위로 전이된 4기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직접 밝혔다. 암의 구체적인 종류는 공개되지 않았다.
키건은 173㎝의 크지 않은 체격에도 빠른 몸놀림과 왕성한 활동량, 강한 승부욕을 앞세워 1970∼1980년대 유럽 축구를 대표하는 공격수로 활약하며 ‘킹 케빈’, ‘마이티 마우스’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
1968년 잉글랜드 4부리그 스컨소프 유나이티드에서 프로 무대에 데뷔한 그는 1971년 리버풀로 이적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리버풀에서 6시즌 동안 공식전 323경기에 출전해 100골을 기록했고, 잉글랜드 1부리그 우승 3회와 잉글랜드축구협회(FA)컵 우승 1회, 유럽축구연맹(UEFA)컵 우승 2회, 유러피언컵 우승 1회를 경험했다.
1977년에는 독일 분데스리가 함부르크로 이적했다. 당시 잉글랜드 정상급 선수가 해외 리그로 진출하는 일은 이례적이었다. 키건은 함부르크의 1978∼1979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끌었고, 1980년에는 유러피언컵 결승 무대에도 올랐다.
함부르크에서 활약하던 1978년과 1979년에는 2년 연속 발롱도르를 받았다. 발롱도르를 두 차례 수상한 영국 선수는 키건이 유일하다. 그는 이후 사우샘프턴을 거쳐 1982년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입단했고, 1984년 뉴캐슬을 1부리그로 승격시킨 뒤 선수 생활을 마쳤다.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는 1972년부터 1982년까지 A매치 63경기에 출전해 21골을 넣었다. 이 가운데 31경기에서는 주장 완장을 찼다.
다만 월드컵과는 인연이 깊지 않았다. 잉글랜드가 1974년과 1978년 대회 본선 진출에 실패한 데다 키건도 허리 부상에 시달리면서, 그의 월드컵 출전 기록은 1982년 스페인 대회에서 교체 선수로 뛴 26분이 전부였다. 스페인과의 이 경기는 키건의 마지막 A매치가 됐다.
키건은 경기장 밖에서도 당대 영국 축구의 대중화를 이끈 스타였다. 파마머리와 화려한 복장으로 유행을 이끌었고 광고와 방송에 출연했으며 직접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다. 프리미어리그는 그를 영국 축구선수 가운데 개인의 이름과 이미지를 상업적 브랜드로 활용한 선구적인 인물로 평가했다.
은퇴 후 한동안 스페인에서 생활하던 키건은 1992년 강등 위기에 처한 뉴캐슬의 감독으로 축구계에 복귀했다. 그는 팀을 잔류시킨 데 이어 이듬해 2부리그 우승과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이끌었다.
특히 공격적인 축구로 ‘엔터테이너스’라는 별칭을 얻은 뉴캐슬은 1995∼1996시즌 한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승점 12점 차로 앞섰다. 막판 역전을 허용해 준우승에 그쳤지만, 키건이 지휘한 뉴캐슬은 프리미어리그 초창기를 상징하는 인기 팀으로 자리 잡았다.
키건은 이후 풀럼과 잉글랜드 대표팀, 맨체스터 시티를 지도했고 2008년 뉴캐슬 감독으로 잠시 복귀했다. 풀럼과 맨체스터 시티에서는 각각 상위 리그 승격을 이끌었다. 잉글랜드 대표팀 사령탑으로는 2000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 조별리그 탈락을 겪은 뒤 독일에 패한 직후 물러났다.
뉴캐슬은 키건을 “구단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영향력이 크며 사랑받은 인물 중 한 명”이라고 추모했다. 리버풀도 그의 정신과 공헌이 구단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며 애도의 뜻을 밝혔다. 잉글랜드 축구 리그(EFL)는 성명을 통해 “잉글랜드 축구계의 전설인 키건은 선수와 감독으로서 남긴 영향력으로 여러 세대의 축구 팬들에게 기억될 것”이라며 그를 추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