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만년고 3학년 임호윤군이 이렇게 고백하자 일본 에이신고 마사야군과 유키군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답했다. 이들의 대화는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우리가 미래의 평화를 만들어 가자”는 약속으로 이어졌다. 군국주의라는 일본의 ‘가해’ 역사와 원자폭탄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된 ‘피해’ 기억까지. 어른들도 쉽지 않은 주제를 마주한 한·일 청소년들은 ‘평화’로 답을 찾아갔다.
동북아역사재단 주최 ‘2026 동북아 역사문화 교류사업’ 일환으로 만년고 학생 15명이 19~22일 일본 히로시마를 찾았다.
학생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비밀리에 독가스를 생산한 오쿠노시마를 시작으로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된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일대까지,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차례로 마주했다.
19일 첫 일정은 다케하라시 앞바다의 작은 섬 오쿠노시마였다. ‘토끼섬’으로 유명한 이 섬에서는 중일전쟁 등에 대비한 겨자가스와 루이사이트 등 화학무기가 생산됐다. 학생들은 콘크리트 골조만 남은 발전소 터와 독가스 저장고를 둘러보며 전쟁범죄의 흔적을 확인했다. 이나희양은 “사진으로 봤을 땐 토끼가 뛰어놀고 예쁜 곳이라고만 생각했다”며 “이곳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씁쓸해했다.
20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찾았다.
학생들의 발걸음이 가장 오래 머문 곳은 강제동원 등으로 히로시마에 거주하던 조선인 약 3만명을 기리는 위령비 앞이었다. 학생 대표 이유리양은 한국인 원폭희생자를 기리며 “우리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 만났다. 서로를 이해하고 평화를 지키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전날 일본의 ‘가해’를 마주하고 불과 하루 새 원폭 피해 참상을 목도한 학생들은 복잡한 기색이 역력했다. “원폭이 아니었다면 일본이 또 다른 제노사이드의 가해자가 될 수도 있던 것 아닌가”라는 본질적 질문도 나왔고, “무고한 일본 시민들과 조선인들이 피해를 봤다는 생각에 혼란스럽다”는 학생도 있었다.
21일 만년고 학생들은 고민을 안고 후쿠야마 에이신고를 방문했다.
일본 학생들은 “안녕하세요. 에이신고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서툰 한국어로 인사했다. BTS에 대한 애정으로 한국어 공부를 5년 전 시작했다는 사키양은 “한국을 너무 좋아하고 자주 가고 싶은 마음이 크다”며 “하지만 아직 일본 사회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고 솔직한 심경을 털어놨다. 이어 ‘평화 실천’ 주제 조별 토론이 진행됐다. 평화를 논하기에 앞서 일제강점기와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등 역사 문제는 예민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필수 논의 거리였다. 양교 학생들은 그만큼 신중하고 정중하게 임했다.
최재이양은 “일본과의 교류를 더욱 확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역사적 문제로 인해 양국 간 누적된 오해와 불신을 해소하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한국어를 공부해 온 지히로양은 “졸업한 선배 중 재한 원폭 피해자가 있다”며 “그 선배를 생각하면 평화를 실천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다.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카이양도 자국의 ‘가해 역사’를 인지하고 있다며 “과거를 바꿀 순 없다. 올바르게 배워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만년고 문인식 교사는 “학생들이 역사의 모순을 마주해 스스로 고찰하는 것도 큰 배움의 기회라고 생각한다”며 “역사를 다층적으로 이해하는 시간이었길 바란다”고 했다.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교육홍보실장은 “학생들 간 교류는 미래 평화에 크게 일조할 것”이라며 “국가 간 무분별한 혐오를 줄이는 데도 큰 의미가 있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