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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심판’ 주역 그르기치 힐스, 지구 구하는 ‘재생농업’ 박차 [최현태 기자의 와인홀릭]

<기후변화 맞서는 캘리포니아 와인 산지를 가다 ④그르기치 힐스>

파리의 심판 화이트 와인 1위는 샤토 몬텔레나

와인메이커 마이크 1977년 그르기치 힐스 설립

오가닉·바이오다이나믹·재생농법으로 포도재배

스스로 살아 숨쉬는 생태계 담는 건강한 와인 생산 

 

그르기치 힐스 아메리칸 캐니언 포도밭. 최현태 기자
그르기치 힐스 아메리칸 캐니언 포도밭. 최현태 기자
마이크 그르기치. 홈페이지
마이크 그르기치. 홈페이지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에서 ‘파리의 심판’은 아주 유명한 사건입니다. 1976년 파리에서 보르도 그랑 크뤼 클라세 1등급·부르고뉴 빌라주급 유명 와인들과 나파밸리 와인들이 맞붙은 대회로, 블라인드 심사 결과 레드와 화이트 부문 모두 나파밸리 와인이 1위를 차지하면서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의 부흥을 부릅니다. 당시 화이트 1위에 오른 와인은 샤토 몬텔레나(Chateau Montelena) 샤르도네 1973. 이 와인을 만든 와인메이커가 바로 크로아티아 출신 마이크 그르기치(Mike Grgich)입니다. 그는 생전에 화학 비료를 전혀 쓰지는 않는 건강한 와인을 추구했는데 그의 양조 철학은 오가닉과 바이오다이나믹을 뛰어넘어 이제 생태계를 스스로 살아 쉼쉬게 만드는 ‘재생농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파리의 심판 현장.
파리의 심판 현장.
파리의 심판 화이트 1위 샤토 몬텔레나 1973. 홈페이지
파리의 심판 화이트 1위 샤토 몬텔레나 1973. 홈페이지

◆유기농으로 만드는 건강한 와인

 

마이크는 1977년 자신의 이름을 건 와이너리를 설립해 ‘파리의 심판’의 명성을 이었습니다. 나파밸리 남단에 있는 그르기치 힐스(Grgich Hills) 아메리칸 캐니언(American Canyon) 포도밭으로 들어서자 예쁜 연못, 야자수, 완만한 능선의 포도밭이 어우러지는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집니다. 마이크의 딸 바이올렛 그르기치(Violet Grgich) 최고경영자(CEO), 마이크의 조카 이보 예라마즈(Ivo Jeramaz) 포도밭·생산 총괄부사장 겸 와인메이커, 한국에서 여러차례 만나 더 반가운 예라마즈의 딸 마야 예라마즈(Maja Jeramaz)가 일행을 반깁니다. 이들은 2023년 타계한 마이크를 추억하는 와인 ‘파리스 76(Paris 76)’ 와인과 ‘패러다이스 블록(Paradise Block)’을 소개합니다.

 

파리스 76(오른쪽)과 패러다이스 블록. 최현태 기자
파리스 76(오른쪽)과 패러다이스 블록. 최현태 기자
그르기치 힐스 아메리칸 캐니언. 최현태 기자
그르기치 힐스 아메리칸 캐니언. 최현태 기자

이 와인들은 모두 생물다양성 재생농법(Regenerative Farming)으로 만드는 건강한 와인이랍니다. 카르네로스(Carneros), 욘트빌(Yountville), 러더퍼드(Rutherford), 칼리스토가(Calistoga) 등 나파밸리 핵심 지역에 있는 그르기치 힐스(Grgich Hills)의 모든 포도밭은 2003년 유기농 인증을 받아 농약 등 화학제품을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2019년 포도밭을 건강하게 만드는 ‘재생농법’까지 도입합니다. 이는 토양의 생태계를 스스로 살아 숨 쉬게 만들어 포도나무의 자생력을 극대화하는 농법입니다. 땅을 갈아엎지 않는 ‘무경운 농법’으로 유익한 미생물을 지키고 보리, 호밀, 겨자, 클로버, 완두콩 등 다양한 커버 크롭을 빽빽하게 심어 공기 중의 질소를 흙 속에 자연 공급합니다. 또 가축 방목을 통한 천연 비료 공급으로 건강한 생태계도 유지합니다.

 

오가닉 인증. 홈페이지
오가닉 인증. 홈페이지
왼쪽부터 마이크 그르기치, 바이올렛, 이보 예라마즈. 홈페이지
왼쪽부터 마이크 그르기치, 바이올렛, 이보 예라마즈. 홈페이지
바이올렛 그르기치(오른쪽), 이보 예라마즈. 최현태 기자
바이올렛 그르기치(오른쪽), 이보 예라마즈. 최현태 기자

바이올렛은 포도밭을 걸으며 양조 철학을 설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화학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아버지의 고향 크로아티아는 화학 농약 자체가 없었습니다. 서방에서 농약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60~70년대였지만, 제 아버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농약은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람에게 해롭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일찍 깨달았고, 그 때문에 그르기치 가문에게 유기농은 특별한 선택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마이크 그르기치 . 홈페이지
마이크 그르기치 . 홈페이지
바이올렛 그르기치. 최현태 기자
바이올렛 그르기치. 최현태 기자

CCOF(California Certified Organic Farmers) 자료에 따르면 나파밸리에 유기농 인증을 받은 포도밭은 2024년 기준 전체의 12.5%에 불과합니다. 나파카운티에서 유기농 인증을 받은 포도 생산자는 138곳입니다. 인증을 받지 않았지만 유기농을 사용하는 곳까지 합치면 20% 정도로 추정됩니다.

 

이보는 이처럼 유기농 포도밭 비율이 아직 적은 것은 많은 이들이 농약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고 믿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인류는 농약 없이도 8000년 동안 농사를 지어왔어요. 지금도 농약 없이 얼마든지 농사를 지을 수 있답니다. 그르기치 힐스는 2003년 유기농 인증을 받은 뒤 한동안 바이오다이내믹(Biodynamic) 인증도 유지했답니다. 다만 UC 데이비스 교수가 마이크에게 ‘미신 취급을 받을 수 있는 비과학적인 바이오다이내믹을 한다고 하면 명성에 흠이 갈 수 있다’고 조언, 논란을 싫어했던 마이크가 인증서만 반납했을 뿐 실제 농법은 지금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답니다.”

 

이보 예라마즈.  최현태 기자
이보 예라마즈.  최현태 기자

◆재생농법의 선구자 되다

 

하지만 유기농과 바이오다이내믹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이보가 결국 주목한 것은 토양입니다. “건강한 토양은 결국 얼마나 많은 탄소를 품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토양 속 탄소가 많을수록 더 비옥하고 건강한 땅이 됩니다.”

 

이런 고민 끝에 그르기치 힐스는 2019년 재생농업(Regenerative Farming)을 전면 도입합니다. 이보는 “재생농업은 포도재배뿐 아니라 농업 전체의 미래”라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재생농업은 유기농과 어떻게 다를까요. 재생농업의 핵심은 생물다양성이라고 강조합니다. 화학 비료나 기계 대신 수백마리의 양을 이동 방목하면 양들이 커버 크롭를 먹고 배설물로 자연 영양분을 공급하며,발굽으로 토양을 통기시킵니다. 또 올빼미, 송새, 호로조 등의 조류와 곤충, 꿀벌이 살아갈 수 있는 서식지를 조성하면 살충제 없이 자연적으로 해충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만 종의 식물이 함께 자라고, 새소리와 곤충 소리로 시끄러운 농장이 강한 농장이라는 이보의 설명입니다. 그르기치 힐스는 오리, 닭, 소를 키우고 한때는 1000마리가 넘는 양을 풀어 방목했으며, 곧 공작새도 들여올 계획입니다.

 

이보 예라마즈와 딸 마야.  최현태 기자
이보 예라마즈와 딸 마야.  최현태 기자

특히 재생농업의 원칙은 땅을 갈지 않는 무경운(No-Till) 농법입니다. “토양을 뒤엎는 것은 토양 생태계에 매우 나쁜 영향을 줍니다. 잎은 태양광 패널과 같아요. 광합성으로 만들어진 당의 약 절반을 식물이 미생물에게 내주는데 그 이유는, 미생물이 토양 속 영양분을 식물이 쓸 수 있는 형태로 바꿔주기 때문입니다. 토양에는 이미 수만 년 동안 쓸 수 있는 영양분이 들어 있지만, 미생물이 없으면 식물이 곧바로 이용할 수 없답니다. 그런데 농약을 쓰면 이 미생물이 죽고, 결국 비료를 계속 써야 하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반대로 건강한 미생물 군집이 살아 있으면 토양은 스스로 비옥해지고 병해에도 강해진답니다. 병해충은 전체 생물의 3~5% 정도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95% 이상은 농장에 도움이 되는 미생물과 곤충들인데, 농약을 뿌리면 이들까지 모두 죽어버리는 거죠. 그러면 황폐해진 토양에는 가장 강인한 잡초와 병해충부터 다시 나타나기 때문에 농약만으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다양한 커버크롭을 심은 포도밭을 살피는 바이올렛 그르기치. 최현태 기자
다양한 커버크롭을 심은 포도밭을 살피는 바이올렛 그르기치. 최현태 기자

이보는 지난 100년 동안 농업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로는 ‘단일재배(Monoculture)’를 꼽았습니다. 한 작물만 광대하게 심으면 병해충이 순식간에 밭 전체로 퍼지지만, 여러 작물을 함께 심으면 해충이 이동하는 순간 먹이를 찾지 못해 개체 수가 자연스럽게 줄어든다는 설명입니다. 그르기치 힐스는 이를 막기 위해 포도밭에 20여종의 커버 크롭을 심어 놓았습니다. 자란 풀은 베거나 롤러로 눕혀 토양 위에 약 8~10㎝ 두께의 자연 덮개(Mulch)를 만듭니다. 이 멀치가 유익한 미생물을 보호하는 역할도 합니다. “기온이 약 32℃인 날, 흙을 갈아엎은 포도밭의 토양 온도는 약 66℃까지 올라갑니다. 반면 멀치로 덮인 우리 포도밭의 토양은 약 24℃ 정도에 불과합니다. 토양 온도가 66℃까지 오르면 표층 10㎝ 안의 미생물이 거의 모두 죽고, 수분 증발도 빨라진답니다.”

 

파리스 76 샤르도네. 최현태 기자
파리스 76 샤르도네. 최현태 기자
파리스 76. 홈페이지
파리스 76. 홈페이지

▶파리스 76 샤르도네

 

그르기치 힐스 와인은 나라셀라에서 수입합니다. 파리스 76 샤르도네는 1976년 ‘파리의 심판’의 주역 마이크에 헌정하는 와인으로 매년 극소량 한정 생산합니다. 잘 익은 서양배와 감의 풍성한 과실 향에 이어 은은한 바닐라와 짙은 향나무를 연상시키는 스파이시한 뉘앙스가 겹겹이 레이어를 이룹니다. 입에서는 레몬 커드와 금귤의 생동감 넘치는 시트러스 풍미가 가득 채웁니다. 풍부하고 묵직한 질감을 지녔지만 팽팽하게 날이 선 산도가 와인의 긴장감을 피니시까지 단단하게 붙잡아 줍니다. 압권은 여운입니다. 마치 분필을 부드럽게 긁어낸 듯한 섬세한 ‘초키(Chalky) 미네랄리티’가 길고 정교하게 이어지며 카르네로스(Carneros) 샤도네이 특유의 우아함을 선명하게 각인시킵니다.

 

그르기치 힐스 나파밸리 샤르도네. 최현태 기자
그르기치 힐스 나파밸리 샤르도네. 최현태 기자

그르기치 힐스의 정체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포도는 나파 밸리 최남단, 서늘한 기후를 자랑하는 카르네로스 자리한 와이너리의 가장 오래된 싱글 블록 포도밭에서 수확합니다. 특히 1989년에 식재한 ‘올드 웬티 클론(Old Wente Clone)’을 중심으로 재배하며, 모든 포도는 100% 유기농과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으로만 키워냅니다. 자연의 균형을 최대한 존중하며 대지의 생명력을 포도에 온전히 담아내려는 와이너리의 철학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물입니다.

 

그르기치 힐스 와인을 소개하는 마야. 최현태 기자
그르기치 힐스 와인을 소개하는 마야. 최현태 기자

양조 방식 역시 50년 전 우승 와인의 스타일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습니다. 인공 효모 대신 포도밭 고유의 토착 효모만으로 자연 발효를 진행합니다. 가장 주목할 점은 일반적인 캘리포니아 고급 샤도네이와 달리 말로락틱 발효를 전혀 거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덕분에 샤도네이 품종 본연의 선명한 산도와 순수한 과실미가 입안에서 그대로 살아 숨 쉽니다. 발효를 마친 와인은 프렌치 오크에서 12개월간 숙성 기간을 거칩니다. 이때 새 오크통의 비율을 40%로 제한하고 소형 배럴과 대형 푸드르(Foudre) 오크통을 조화롭게 활용합니다. 과도한 오크 향으로 포도 본연의 맛을 가리기보다, 과실의 순수함과 밭이 가진 미네랄리티의 균형을 극대화하기 위한 정교한 선택입니다.

 

패러다이스 블록.
패러다이스 블록.

▶패러다이스 블록(Paradise Block)

 

잘 익은 블랙 카시스와 상큼한 오렌지 필, 블루베리와 라즈베리의 화려한 과실 향이 먼저 피어오르고, 그 뒤로 말린 허브와 피망, 샌달우드(향나무)의 이국적인 스파이스가 겹겹이 층을 이룹니다. 입안에 머금으면 촘촘하면서도 비단처럼 부드러운 타닌이 입안 전체를 벨벳처럼 감싸 안습니다. 신선한 무화과와 검은 과실류의 진한 풍미 속에 카카오, 욘트빌 테루아를 대변하는 은은한 천일염의 짭조름한 풍미와 월계수 잎 향이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피니시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고 고혹적인 여운을 남깁니다.

 

그르기치 힐스 마이크 100세 기념 에디션 카베르네 소비뇽. 최현태 기자
그르기치 힐스 마이크 100세 기념 에디션 카베르네 소비뇽. 최현태 기자

2025년 가을 첫선을 보인 이 와인은 ‘파리의 심판’ 영광을 일궈낸 거장 마이크를 기리는 와인입니다. 나파 밸리 욘트빌(Yountville)에 위치한 에스테이트 포도밭 중에서도 가장 유서 깊은 ‘블록 6’과 ‘블록 7’에서 자라는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만듭니다. 무려 1959년에 식재돼 나파 밸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오래된 카베르네 소비뇽입니다. <기후변화 맞서는 캘리포니아 와인 산지를 가다 ⑤에서 계속>

 

최현태 기자는 국제공인와인전문가 과정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레벨3 Advanced, 프랑스와인전문가 과정 FWS(French Wine Scholar), 부르고뉴와인 마스터 프로그램, 뉴질랜드와인전문가 과정, 캘리포니아와인전문가 과정 캡스톤(Capstone) 레벨1&2를 취득한 와인전문가입니다. 2018년부터 매년 유럽에서 열리는 세계최대와인경진대회 CMB(Concours Mondial De Bruxelles) 심사위원, 2017년부터 국제와인기구(OIV) 공인 아시아 유일 와인경진대회 아시아와인트로피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소펙사 코리아 한국소믈리에대회 심사위원도 역임했습니다. 독일 ProWein, 이탈리아 Vinitaly 등 다양한 와인 엑스포를 취재하며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미국, 호주, 독일, 체코, 스위스, 조지아, 아르메니아, 중국 등 다양한 국가의 와이너리 투어 경험을 토대로 독자에게 알찬 와인 정보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