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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만 가는 곳인 줄 알았는데”…1998년생 MZ 아나운서, 경마장에 뜬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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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용 아나운서, 2025년 경주 영상 전수 분석…매주 현장 찾아 4개월 만 데뷔
대본 없이 수십 마리 실시간 구분…순발력·집중력이 핵심
“모든 선배가 롤모델”…장점 모아 나만의 중계 스타일 도전

경주가 시작되면 수십 마리의 말이 일제히 출발대를 박차고 나간다. 순식간에 선두가 바뀌고, 안쪽에서 달리던 말이 바깥쪽으로 치고 나오며, 중위권에 머물던 말이 어느새 우승 경쟁에 뛰어든다. 불과 1분 남짓한 시간 동안 펼쳐지는 질주 속에서 경마 아나운서의 시선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몇 번 말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말이 앞서고 뒤처지는지, 승부처가 어디인지 한순간도 놓쳐서는 안 된다. 여기에 출전마의 이름과 기수까지 정확하게 불러야 한다.

 

위 사진은 AI(인공지능)를 활용해 생성된 가상의 이미지입니다. OpenAI의 대화형 인공지능 ChatGPT 생성 이미지.
위 사진은 AI(인공지능)를 활용해 생성된 가상의 이미지입니다. OpenAI의 대화형 인공지능 ChatGPT 생성 이미지.

경마 중계에는 정해진 대본도 없다. ‘추입’과 ‘다크호스’라는 말이 상징하듯 마지막 순간까지 승부를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경마다. 빠르게 움직이는 여러 마리를 실시간으로 구분하면서 순위 변화를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는 만큼, 경마 아나운서에게는 뛰어난 순발력과 집중력, 그리고 경마에 대한 높은 이해도가 요구된다. 베팅 스포츠라는 특성상 단 한 번의 잘못된 전달도 경마팬들에게는 민감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화려해 보이는 경마 중계의 이면에는 출전마의 최근 성적과 주행 습성, 기수와 조교사 정보 등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는 시간이 자리 잡고 있다. 1분 남짓한 경주를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수십 차례 경주 영상을 돌려보고, 수많은 출전마를 머릿속에 담아야 하는 직업. 경마 아나운서는 ‘경마장의 꽃’으로 불리지만, 동시에 상당한 전문성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이색 직업이기도 하다.

 

지난 18일 토요일 서울 경마장에 새로운 목소리가 등장했다. 올해 2월 한국마사회(KRA·회장 우희종)에 공채로 입사한 1998년생 이문용 아나운서가 약 4개월간의 훈련을 마치고 서울 2경주를 통해 공식 데뷔전을 치른 것이다. 그는 차분하면서도 안정적인 목소리로 출발부터 결승선 통과까지 경주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전달하며 첫 중계를 무사히 마쳤다. 오랜 시간 경마팬들에게 익숙했던 목소리들 사이에서 이제 막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문용 아나운서가 경마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준비한 과정은 남달랐다. 그는 최종 합격의 비결로 ‘2025년도 경주영상 전수 분석’​을 꼽았다. 서류 지원 기간부터 매주 렛츠런파크를 찾아 경마 현장의 분위기를 익혔고, 경마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기본적인 경마 상식은 물론 팬들이 경마에서 무엇을 재미있어하고 어떤 순간에 열광하는지도 귀 기울여 들었다. 이동하는 시간에는 경마 중계를 라디오처럼 들었고, 지난해 펼쳐진 경주 영상을 사실상 ‘전수 분석’하다시피 했다.

 

경마를 단순히 외우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장을 이해하려 했던 것은 경마 중계 역시 결국 경주를 이해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부터 경마 아나운서를 꿈꿨던 것은 아니다. 계기는 의외의 곳에서 찾아왔다. 일본 홋카이도의 한 소도시를 여행하던 중 경마 아나운서가 중계하는 모습을 우연히 접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 아나운서는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경주에 몰입해 열정적으로 중계했고, 경주가 끝난 뒤에는 환호하는 관객들을 향해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는 것이 이 아나운서의 설명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마사회 채용공고를 발견했다. 여행지에서 스쳐 지나갔던 장면이 실제 직업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나운서는 이를 ‘운명이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지원했고, 약 4개월의 훈련을 거쳐 마침내 자신이 동경했던 경마 중계석에 섰다.

 

그러나 막상 중계석에 앉아보니 경마 중계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이 아나운서가 꼽은 가장 중요한 역량 역시 ‘순발력’이다. 분당 발화량이 많은 데다 발음하기 어려운 마명도 적지 않고,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여러 마리의 말을 실시간으로 구분하면서 동시에 순위 변화와 경주 흐름까지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해설위원과 함께 경기를 풀어가는 다른 스포츠와 달리 경마는 오롯이 혼자 경주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점도 부담으로 작용한다.

 

그는 “아나운서의 꿈을 갖고 준비하면서 연습했던 수많은 장르 중 경마 중계가 단연 어렵다고 느낀다”며 “이 모든 것들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순발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막 경마 중계에 뛰어든 신인 아나운서가 참고하는 롤모델은 누구일까. 이 아나운서는 특정 한 명을 꼽는 대신 “모든 선배 아나운서들이 롤모델”​이라고 답했다. 지난해 경주 영상을 빠짐없이 돌려보면서 선배 아나운서들의 중계를 분석한 결과, 스포츠 중계에는 정답이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경력이 가장 긴 김수진 아나운서에게서는 위트 있는 표현과 경마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같은 남성 아나운서인 박화중 아나운서에게서는 폭발적인 샤우팅과 시적인 표현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각각의 장점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결국에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중계 스타일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첫 경주를 무사히 마친 이 아나운서는 이제 막 출발선을 통과했다. 앞으로도 수많은 경주에서 수십 마리의 출전마를 실시간으로 구분하고, 매 순간 요동치는 순위를 따라가며, 마지막 결승선까지 경주의 긴장감을 목소리 하나로 전달해야 한다. 때로는 차분하게, 때로는 폭발적으로 경마팬들의 심장을 뛰게 하는 중계가 그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