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간 넘게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대륙을 가로질러 낯선 도시에 도착한다. 경기를 마치면 샤워만 겨우 하고 다시 버스에 올라 다음 도시로 이동한다. 메이저리그 문턱 아래, 수천 명의 선수가 희망 하나로 견디는 ‘버스 리그’의 일상이다. 대부분은 그 버스 안에서 청춘을 보내고 이름도 없이 사라진다.
2012년 열여덟의 나이로 마이애미 말린스에 지명된 한 청년도 그 버스에 올라 6년을 버텼다. 649경기. 메이저리그 데뷔까지 마이너리그에서 뛴 경기 수다.
2018년 여름 마침내 밟은 꿈의 무대에서 첫 안타를 홈런으로 쏘아 올리자, 더그아웃의 동료들은 관중석을 향해 팔을 흔들었다. 공을 돌려달라고, 평생 간직하게 해주자고. 그날 그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꿈의 무대는 그를 오래 세워두지 않았다. 고교 시절 내야수였던 그는 입단과 동시에 외야로 자리를 옮겨야 했고 ‘외야 수비도 못하는 만년 후보’라는 낙인 속에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오르내렸다. 세인트루이스로, 샌프란시스코로 유니폼을 갈아입어도 주전 자리는 없었다.
2022년 9월에는 모처럼 콜업돼 3경기에서 8타수 3안타를 치고도 사흘 만에 다시 내려갔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메이저리그였다. 열여덟부터 좇던 꿈이, 스물여덟에 끝이 났다.
저주에 갇혀 있던 LG
같은 시기, 태평양 건너의 한 구단도 오래된 고민을 안고 있었다. 한국 프로야구 LG 트윈스. 유독 외국인 타자 복이 없는 팀이었다. 매년 새 얼굴을 데려와도 성공 사례는 드물었고, 우승과도 좀처럼 인연이 닿지 않았다.
2023년 시즌을 앞두고 LG가 고른 카드는 아브라함 알몬테. 장타력에 스위치히터라는 매력까지 갖춘 선수였다. 그런데 메디컬 테스트에서 이상이 발견돼 계약이 취소됐다. 급히 데려온 대안은 메이저리그 통산 타율 0.228의 무명 외야수였다.
오스틴 딘(32). 이 ‘플랜B’가 LG의 역사를 바꾸게 된다.
한 달 만에 뒤집힌 시선
영입 당시 시선은 차가웠다. ‘역시 LG 외국인 타자는 안 된다’는 반응이 먼저였다. 뒤집는 데는 한 달이면 충분했다. 개막 초반 헛스윙이 거의 없는 정교한 타격으로 화제를 모았고, 이후 타점을 쓸어 담으며 LG 외국인 선수 최초의 그라운드 홈런까지 터뜨렸다. 외야가 아닌 1루에서는 안정된 수비를 보여줬다.
KBO 첫 시즌 성적은 139경기 타율 0.313, 23홈런 95타점, OPS 0.893. 팀의 4번 타자로 한국시리즈를 책임졌고, LG는 29년 만에 통합 우승을 차지했다. 그해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 투표에서는 291표 중 271표가 그에게 쏠렸다. LG 외국인 선수 최초의 황금장갑.
달라진 건 기회였다
2년 차에는 132타점으로 타점왕에 올랐다. 이 역시 구단 역사상 최초였다. 같은 해 KBO 수비상 1루수 부문까지 받았다. 미국에서 약점이라 불리던 수비가 갑자기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곳에서 보낸 10년의 경험이, 꾸준한 기회를 얻고서야 쓰일 곳을 찾았을 뿐이다.
그해 골든글러브 시상식장. 외국인 선수로는 유일하게, 팬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미국에서 날아와 단상에 섰다.
“이 상의 영예는 놀라운 팀 동료들과 코치님들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KBO리그의 일원인 것을 정말로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LG에서 끝내고 싶다”
지난해에는 두 번째 우승 반지를 꼈다. 구단 역사상 유일한 2회 우승 외국인 선수이자 최장수 외국인 타자다.
미국인 오스틴 딘은 한국에서 성씨 하나를 얻었다. 팬들이 붙여준 ‘잠실 오씨’다. 아예 한국식 이름 ‘오수진’으로 불리기도 한다.
경기 전 익사이팅석에 들러 공과 유니폼에 사인을 해주는가 하면, 어린이 팬에게 배트를 선물한 일화도 있다. 홈 팬뿐 아니라 원정 팬 사이에서도 미담이 쌓인다.
잠실야구장에는 ‘무적 LG의 오스틴 딘’ 응원가가 울려 퍼지고, 관중석에는 그의 유니폼이 유독 많다. 일부 팬들 사이에서는 벌써 영구결번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그의 바람도 분명하다.
“LG 트윈스에서 경력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올해로 4년째 잠실의 세로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1루에 서 있다. 버스 안에서 이름도 없이 사라질 뻔했던 청춘은 지구 반대편에서 누구도 지우지 못할 이름을 남기고 있다. 플랜B로 온 이방인은, 이미 LG의 역사가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