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등을 상대로 체포영장을 청구해 유명해진 카림 칸(56) 국제형사재판소(ICC) 검사장이 성범죄 혐의로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다. 미국이 ICC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해체’까지 검토하는 가운데 ICC는 국제사회에서 더욱 입지가 좁아졌다.
24일(현지시간) BBC 방송에 따르면 ICC 협약 당사국 대표들은 이날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회의를 열고 칸 검사장 해임안을 표결에 붙인 끝에 찬성 82표로 통과시켰다. 유엔 산하 기관인 ICC 회원국은 한국 등 125개국으로, 그 과반인 63개국 이상이 동의한 만큼 현재 정직 상태인 칸 검사장은 ICC를 완전히 떠나야 한다.
칸 검사장은 ICC 검찰국이 아닌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던 여성 직원을 자신의 사무실로 발령을 낸 뒤 해외 출장 등에 동행하며 부적절한 성적 접촉을 시도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해당 여직원의 문제 제기로 ICC 내부에서 조사가 시작된 뒤 이번에는 칸 검사장이 영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2009년에도 여성 인턴을 성추행했다는 제보가 접수됐다.
최근까지 직무가 정지된 채 조사를 받아 온 칸 검사장은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그의 변호인은 “가능한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해 해임 결정의 합법성과 공정성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국제기구인 ICC의 검사장에게 어떤 불복 절차가 보장될 것인지에 관해선 회의적 견해가 대세다.
칸 검사장은 1970년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파키스탄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런던 킹스칼리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그는 검사로 일하다가 1997년 옛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 검사로 부임하며 처음 국제 사법 기관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캄보디아·레바논 특별재판소 등에서 일하며 전쟁 범죄의 진상 규명과 심판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았다.
ICC 검사장으로 부임한 것은 2021년의 일이다. 그는 2023년 푸틴을 겨냥한 체포영장을 ICC 재판관들에게 청구해 발부를 받아냄으로써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칸 검사장은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적용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러시아 검찰은 칸 검사장을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했으며, 모스크바 법원은 궐석재판 끝에 2025년 12월 그에게 징역 15년형을 선고했다.
칸 검사장은 2024년에는 네타냐후 체포영장을 청구해 역시 발부가 이뤄졌다. 그는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근거지인 가자 지구 공격 도중 민간인 학살 등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며 네타냐후에게 책임을 물었다. 이스라엘의 맹방인 미국은 격노한 나머지 칸 검사장 등 ICC 관계자 일부를 미 행정부의 제재 대상자 명단에 올렸다. 현재 그는 미국 입국이 금지된 상태다.
미국은 러시아, 이스라엘 등과 마찬가지로 ICC 협약 당사국이 아니다. 다만 올해 들어 미군이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체포하고 이란을 공격한 점을 들어 “ICC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전범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행여 ICC가 트럼프를 상대로 체포영장을 발부하거나 기소 절차를 밟기 전에 ICC를 무력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미 행정부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런 가운데 칸 검사장이 성범죄 혐의로 낙마했으니 ICC의 도덕적 권위도 땅에 추락하고 말았다. 국제사회에선 트럼프의 견제로 가뜩이나 어려운 ICC가 더욱 곤란한 지경에 내몰렸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