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는 깊은 바다 속이나 아득한 우주 한복판에서 배터리 충전이나 교체 없이 50년 이상 스스로 전기를 만들어 작동하는 ‘꿈의 전지’ 기술이 국내 연구진에 의해 현실로 다가왔다.
26일 한국전기연구원(KERI)에 따르면 차세대반도체연구센터 서재화 박사팀이 국립경국대학교 윤영준 교수팀과의 공동 연구를 통해 우주와 극지 등 극한 환경에서도 50년 이상 안정적으로 전력을 생산하는 ‘탄화규소(SiC) 반도체 기반 베타전지’를 국내 최초로 실증했다.
이번 연구 성과는 에너지 분야의 세계적 권위 학술지인 ‘인터내셔널 저널 오브 에너지 리서치(International Journal of Energy Research, JCR 상위 3.6%)’에 게재되며 학술적 우수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햇빛 대신 방사선 먹고 작동…‘영구 전지’ 베타전지란?
‘베타전지’는 방사성 물질이 안정적인 상태로 변할 때 자연스럽게 내뿜는 미세한 전자(베타선)를 반도체가 흡수해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장치다.
우리가 흔히 아는 태양전지가 햇빛을 받아 전기를 만드는 원리와 비슷하지만 태양빛 대신 방사성 물질을 에너지원으로 삼는다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다.
이 때문에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깊은 바다나 땅속, 아득한 우주 공간에서도 날씨나 온도 변화에 상관없이 수십 년 동안 꾸준히 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번 연구에 사용된 방사성 원료인 ‘니켈-63(Ni-63)’은 방사능 세기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반감기가 약 100년에 달해 이론상 50년에서 최대 100년까지 전지를 작동시킬 수 있다.
특히 베타선은 종이 한 장으로도 막을 수 있을 만큼 투과력이 약해 전용 용기에 단단히 밀봉하면 방사선 누출 위험 없이 매우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
◆기존 기록 대비 6만배 향상…차세대 SiC 반도체로 한계 극복
그동안 베타전지는 전기를 모으는 효율이 낮고, 국내에 방사성 물질을 안전하게 다루며 성능을 시험할 기반 시설이 부족해 상용화에 큰 제약이 있었다.
KERI 연구팀은 이러한 한계를 넘기 위해 기존 실리콘 반도체 대신 열과 방사선에 훨씬 강한 신소재인 ‘탄화규소(SiC)’ 반도체를 핵심 소재로 선택했다.
여기에 방사선을 전기로 바꾸는 효율을 최고로 끌어올릴 수 있는 독자적인 반도체 구조(p-i-n 다이오드)를 설계해 원천 기술을 확보했다.
이어 까다로운 안전 기준을 통과해 실제 방사성 원료인 니켈-63을 확보하고 국내 최초로 전용 측정 설비를 구축해 실증에 나섰다.
그 결과 연구팀은 실제 전력 활성면적 환산 기준 제곱센티미터당 약 160마이크로와트의 전력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으며, 이 전기로 저전력 LED 불빛을 밝히는 시제품까지 완벽히 작동시켰다.
이는 과거 국내에서 보고된 실험 결과보다 무려 6만배 이상 향상된 수치로, 국내 역사상 최고 수준의 성능이다.
연구팀은 방사성 물질을 반도체 표면에 얇고 고르게 바르는 이상적인 방식을 적용할 경우, 기존 국내 단위 셀 출력 목표치보다 4200배 이상 높은 성능을 낼 수 있음도 확인했다.
이는 전지 크기를 키우고 여러 개를 쌓아 올리는 집적화 공정을 더할 경우 글로벌 선도기업들의 상용화 제품과도 충분히 겨룰 수 있는 세계적 기술력이다.
◆AI 예측 모델 도입·1500만 볼트급 ‘우주 방사선 폭우’ 테스트 통과
연구팀은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첨단 인공지능(AI) 기술과 극한 환경 테스트도 전격 도입했다.
국립경국대 윤영준 교수팀과의 협업을 통해 머신러닝(XGBoost) 기반 AI 예측 모델을 구축, 전지의 출력과 전압을 98~99%의 정밀한 정확도로 예측해 내며 앞으로의 개발·설계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또한 우주 공간에서 탐사선이 겪을 수 있는 가혹한 환경을 모사하기 위해 15메가전자볼트(MeV)급 고에너지 양성자 조사 실험을 국내 최초로 수행했다.
15메가전자볼트는 1500만 볼트의 전압으로 가속된 입자가 때리는 수준으로, 우주 한복판에서 쏟아지는 ‘방사선 폭우’를 맨몸으로 견뎌내는 극한의 조건이다.
연구팀은 이처럼 가혹한 상태에서도 전지가 버티는 정량적 데이터를 확보해 실제 우주 임무에서의 높은 신뢰성을 입증했다.
◆우주·방산·원전 감시 등 차세대 핵심 동력 기대
베타전지는 전기차처럼 순간적으로 큰 힘을 내는 전지라기보다는 사람의 접근이 힘든 오지나 극한 환경에서 수십 년 동안 정비 없이 미세한 전력을 꾸준히 공급하는 ‘초장수명 특수 전원’이다.
서재화 박사는 “평소에는 극도로 적은 전력만 쓰며 에너지를 모았다가 주기적으로 신호를 보내는 국방 무인 감시 센서나, 우주 및 심해의 비상 신호기(Beacon)를 50년 이상 스스로 작동하게 만드는 핵심 동력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연구팀은 이번 기술에 대한 국내 특허 출원을 마쳤으며, 향후 우주항공, 방위산업, 원전 및 방사선 안전 감시, 원격 센서 관련 기업들과 협력해 기술이전 및 공동 제품 개발을 추진할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