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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 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13> 달라이 라마 14세(The 14th Dalai Lama)-‘인간은 증오 없이 저항할 수 있는가’

"나의 종교는 연민과 친절"

인간은 폭력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 국가와 국가가 충돌하고, 이념과 민족이 서로를 적대하며, 종교조차 때로는 전쟁의 언어가 되는 시대 속에서, 끝까지 ‘비폭력’을 말한 종교지도자가 있다. 바로 달라이 라마 14세(The 14th Dalai Lama)다. 개인 이름은 텐진 갸초(Tenzin Gyatso). 그는 불교의 수행자에 머물지 않고, 고향을 떠난 망명 생활 속에서도 복수보다 연민을 말한 인물이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1935년 티베트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전통적인 절차를 거쳐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로 인정받았다. 티베트 불교에서 달라이 라마는 종교지도자와 정신적 스승, 그리고 정치적 지도자의 역할까지 함께 지닌 존재다. 이로 인해 그는 어린 나이에 티베트의 오랜 전통과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의 1997년 작 영화 《티벳에서의 7년(Seven Years in Tibet)》 포스터. 오스트리아의 산악인 하인리히 하러(브래드 피트 분)가 어린 달라이 라마 14세를 만나 우정을 나누며 겪는 사상적 내면의 변화를 실화를 바탕으로 다루었다. 이 영화는 당시 서구 사회에 티베트의 평화로운 문화와 비극적 역사를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출처: Mandalay Entertainment &#47; TriStar Pictures
장 자크 아노 감독의 1997년 작 영화 《티벳에서의 7년(Seven Years in Tibet)》 포스터. 오스트리아의 산악인 하인리히 하러(브래드 피트 분)가 어린 달라이 라마 14세를 만나 우정을 나누며 겪는 사상적 내면의 변화를 실화를 바탕으로 다루었다. 이 영화는 당시 서구 사회에 티베트의 평화로운 문화와 비극적 역사를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출처: Mandalay Entertainment / TriStar Pictures

◆망명 속에서도 비폭력의 길을 선택하다

 

티베트는 7세기경 강력한 왕조를 형성했다. 그 이전까지 티베트 고원은 여러 부족과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야를룽 왕조의 군주였던 송첸 감포(약 617~650)가 이를 통합하며 부족 연맹 수준이던 티베트를 하나의 왕국으로 만들었다. 송첸 감포 시대의 티베트는 당나라나 중앙아시아 세력과 맞설 정도의 강한 국가였다. 송첸 감포는 당나라의 문성공주와 혼인하기도 했으며, 특히 불교 문화를 받아들여 티베트 불교의 기초를 놓은 왕으로 평가받는다.

 

티베트에 달라이 라마 체제가 본격화한 것은 17세기다. 달라이 라마는 종교적 권위뿐 아니라 국가 통치자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만 해도 티베트는 자체 정부와 군대를 보유하고, 외교의 일부를 수행하는 등 사실상 독립 국가의 형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1921년 창당된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하고 사회주의 정부를 세우면서, 티베트는 거대한 역사적 격변을 맞이했다. 20세기 중반 중국이 티베트와의 국경 통합과 중앙집권 강화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1950년 중국 공산당은 군사력을 앞세워 티베트 지역으로 진입해 수중에 넣었다. 당시 세계는 한국 전쟁에 이목이 쏠려 있었기에 티베트에 관심을 두지 못했다. 중국군은 역사적으로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였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후 긴장과 갈등이 심화되다가 마침내 1959년 티베트 봉기가 발생했다. 티베트 봉기는 주민들과 일부 승려, 귀족 세력이 중국의 통치에 반발해 일으킨 대규모 저항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도 결국 진압되면서 달라이 라마 14세는 인도 북부 다람살라로 피신해 망명정부를 세웠으며, 오늘날 티베트는 중국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티베트 봉기는 달라이 라마의 삶 전체를 바꾸어 놓았다. 조국을 떠난 지도자가 된 그는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망명한 젊은 종교 지도자’라는 상징성을 얻었다. 대개의 망명 지도자들이 무장투쟁과 민족주의, 정치 선동의 길을 걸었던 것과 달리, 달라이 라마는 수십 년의 망명 생활 동안 비폭력과 연민(Compassion), 대화와 인간의 존엄을 지속적으로 내세웠다. 이러한 행보는 세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달라이 라마 14세가 세계적인 인물이 된 것은 그가 조국을 잃은 망명 지도자로서 냉전과 국제정치의 한복판에 서 있으면서도 끝까지 비폭력과 연민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의 세계적 명성은 종교와 정치, 인권과 영성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불교 교리를 설파하는 데 머물지 않고, 행복과 마음의 평화, 분노 조절, 공감, 용서, 인간 윤리 같은 보편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종교지도자의 위상을 넘어섰다.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1989년 노벨평화상 수상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완전히 세계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했으며, 국제사회는 그를 비폭력 저항의 상징이자 윤리적인 평화 지도자로 평가했다.

 

◆세계인의 '마음의 스승'이 되다

 

현대 세계가 그에게 주목한 이유는 현대인들이 종교 교리보다 마음의 치유와 평화, 스트레스 해소와 인간성 회복에 더 많은 관심을 두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는 이러한 요구에 부합하는 메시지를 던지며 ‘교리의 종교인’이 아닌 ‘마음의 스승’으로 이미지를 바꿨다. 1990년대 이후 다큐멘터리와 영화, 인터뷰, 세계 강연 등을 통해 그의 영성적 이미지는 더욱 확산되었으며, 특히 서구에서는 ‘웃는 수행자’의 모습으로 깊이 각인되었다.

 

이러한 이미지를 세계 대중에게 각인시킨 작품 가운데 하나가 1997년 개봉한 영화 《티벳에서의 7년》이다. 영화는 오스트리아 산악인 하인리히 하러(브래드 피트 분)가 어린 달라이 라마와 우정을 나누며 세계지리와 과학을 가르친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1938년 스위스 알프스의 아이거 북벽(3,967m)을 최초로 등정해 세계적인 산악인으로 이름을 알린 하러는 이듬해 히말라야의 고봉 난가파르바트(8,126m) 원정을 위해 영국령 인도를 찾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영국군에 억류되었고, 수용소를 탈출한 뒤 1946년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외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남달랐던 어린 달라이 라마를 만나 평생 잊지 못할 우정을 쌓게 된다. 영화는 중국군의 침입으로 평화롭던 티베트의 일상이 무너지는 과정을 배경으로, 달라이 라마가 증오보다 연민과 평화를 선택해 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내며 세계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했다.

 

미국 배우 리처드 기어 역시 오랫동안 티베트 불교를 수행하며 달라이 라마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신앙은 영화 《티벳에서의 7년》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어져 왔으며, 이후 티베트 인권 운동과 문화 보존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젊은 시절부터 명상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달라이 라마 14세와의 만남 이후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티베트를 위한 국제 캠페인을 벌이는 한편, 관련 단체를 지속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의 사상은 그의 저서를 통해서도 세계인들에게 널리 전해졌다. 자서전 《망명 속의 자유》에서는 티베트를 떠나 망명정부를 세우기까지의 과정과 비폭력 신념을 직접 들려준다. 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행복론》에서는 행복은 외부 환경보다 마음의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하며 종교를 초월한 공감을 얻었다. 이 밖에도 《새 천년을 위한 윤리》를 통해 인류가 함께 지켜야 할 보편적 윤리를 강조했다. 이러한 저서들은 그의 영성을 불교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인의 삶 속으로 확장시키는 역할을 했다.

 

나라를 잃고 정치적 억압과 민족 갈등을 겪으면서도 그가 무장투쟁 대신 비폭력을 선택한 이유는 그의 영성 핵심에서 찾을 수 있다. 티베트 불교는 인간의 고통이 분노와 집착,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에게 폭력은 또 다른 고통을 낳는 연쇄 작용일 뿐이었다. 이 연쇄를 끊어내는 핵심 열쇠가 바로 ‘용서(Forgiveness)’다. 달라이 라마가 말하는 용서는 가해자의 잘못을 무조건 묵인하거나 처벌을 포기하는 유약한 타협이 아니다. 그에게 용서란 가해자가 심어놓은 분노와 증오로부터 마음의 자유를 지켜내는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이다. 상대를 향한 미움에 사로잡혀 있는 한, 자신은 여전히 가해자에게 지배당하는 상태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용서는 타인을 위한 시혜를 넘어 자신의 내면을 치유하고 평화를 회복하는 적극적인 정신적 저항이다.

 

◆연민과 용서, 증오를 넘어서는 영성

 

달라이 라마의 가장 유명한 메시지 중 하나인 연민도 이러한 용서의 태도와 직결된다. 그는 “행동은 비판할 수 있지만, 인간 자체를 증오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을 만든다”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이는 현실 정치에서 쉽게 취하기 어려운 태도다. 무엇보다 그는 중국 정부에 대한 비판과 중국인 개개인에 대한 증오를 철저히 구분하려 노력했다. 그가 남긴 말들은 그의 현실적 영성관과 불교적 비폭력 사상을 잘 보여준다.

 

“나의 종교는 친절이다.” “용서는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미래를 넓힐 수 있다.” “행복은 준비된 결과가 아니다.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서 나온다.” “증오는 증오로 끝나지 않으며 멈추지도 않는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멈춘다.” “남을 행복하게 하고 싶다면 연민을 실천하라. 당신 자신이 행복해지고 싶다면 역시 연민을 실천하라.” “세계 평화는 개인의 내면 평화에서 시작된다.”….

 

달라이 라마는 모든 인간이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피하려 한다는 보편적 사실에 주목했다. 따라서 적이나 가해자 역시 결국 무지와 두려움 속에 있는 존재라는 시각을 유지했다. 비폭력이야말로 장기적으로 인간성을 보존하고 세계 여론의 공감을 얻는 힘이 된다고 믿었기에 많은 사람들은 그를 마하트마 간디의 전통 위에 놓기도 한다.

 

물론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 저항 운동이 티베트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다. 티베트 문제는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으며, 비폭력 노선에 대한 내부의 비판적 시선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비폭력을 견지했다. 그 결과 망명지에서도 수도원을 재건하고 교육 기관을 세워 티베트어와 전통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다. 오늘날 인도 다람살라는 망명 티베트 문화의 중심지로 기능하며, 티베트인의 문화와 종교, 정체성을 이어가는 구심점이 되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국제사회에서 잊혀질 뻔한 티베트 문제를 세계적인 의제로 끌어올렸고, 티베트의 역사와 문화가 세계의 기억 속에 남도록 했다. 올해 91세인 그는 지금도 증오 없이 저항할 수 있다는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영적 지도자로 남아 있다.

 

[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목차

 

<1> 모세-“노예 민족에게 법과 신을 준 사람”

<2> 공자-“혼란한 시대, 인간의 질서를 묻다”

<3> 노자-“세상을 거슬러 흐르지 말라”

<4> 석가모니-“인간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

<5> 조로아스터-“선과 악의 전쟁은 어디서 시작됐는가”

<6> 예수-“사랑은 어떻게 세계를 바꾸었는가”

<7> 무함마드-“신앙은 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하는가”

<8> 성 아우구스티누스-“인간 내면에도 제국은 존재한다”

<9> 토마스 아퀴나스-“신과 이성은 화해할 수 있는가”

<10> 마르틴 루터-“양심은 교황보다 강한가”

<11> 존 웨슬리-“대중 속으로 들어간 종교”

<12> 라마크리슈나-“모든 종교는 같은 산을 오르는가”

<13> 달라이 라마 14세-“인간은 증오 없이 저항할 수 있는가”

<14> 문선명·한학자-분열된 인류는 다시 한 가족이 될 수 있는가

<15> 간디-“정치는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