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끈을 놓으려던 ‘인안나’는 자신의 집이 부서지던 중 바닥 아래 미지의 지하 세계로 서판 ‘둡’과 들어선다. 그곳은 잃어버리고 잊힌 것들이 모여 사는 거대한 집이자 모든 기억이 망각되는 신비로운 웅덩이 ‘키갈’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인안나는 그곳에서 몸에 뿌리가 자란 할머니 ‘주머니’, 망치를 짊어진 채 네 발로 서 있는 언니 ‘핑크’, 돌과 한몸이 되어가는 ‘돌덩이’ 등 믿기지 않는 모습의 가족들을 만난다. 이들은 서로를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고, 오히려 깊은 상처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지하 세계 깊숙한 곳에서 인안나의 어머니 ‘에레쉬’가 깨어나면서, 잊혔던 가족의 비밀과 과거에 대한 실마리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2024년 국립극단이 15년만에 다시 시작한 창작희곡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 ‘역행기’가 2년여에 걸친 준비 끝에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른다.
창작 영역을 고대 수메르 신화로 극대화한 이 작품은 ‘인안나의 명계 하강’ 전설을 변주한다. 신화 속 인안나는 이복언니 에레쉬키갈이 다스리는 지하세계를 찾아가 일곱 개의 관문을 지나며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나체로 죽음을 맞이하지만 신들의 도움으로 부활해 지상으로 돌아온다. 극은 이 신화적 얼개 위에 가부장적 폭력과 노동 현장의 상처를 견뎌낸 여성 3대 이야기를 올린다. 가족이기에 이해받고 싶은 마음과 가족이기에 끝내 이해할 수 없는 모순된 감정이 인물들 사이에서 교차하며 지워진 과거로 역행해 끊어진 삶을 다시 잇는 여정이 전개된다.
이 작품은 국립극단이 2024년 재개한 창작희곡공모에서 발굴된 첫 대상 수상작이다. 총 303편의 응모작 가운데 선정됐다. 심사위원단은 “이야기가 요구하는 상상적 공간의 스케일과 이야기를 추동하는 주제의 다층성을 고려할 때 대작이라 부를 만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자료 조사와 낭독공연 등 개발 과정을 거쳐 약 2년 만에 관객과 만난다. 김주희 작가는 수상소감에서 “어두운 방 안에서 내 인생은 왜 이런가 하며 헛웃음이 나던 순간에 받은 선물 같은 상”이라고 밝혔다. 이어 “가시화되지 않았던 우리 주변 평범한 이들의 삶이 얼마나 눈부시게 가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다. 관객들에게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다정한 노크가 되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9월 3일부터 13일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