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더 지치곤 해….”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 ‘오디세이(The Odyssey)’ 개봉 소식에 옛 노래 하나가 불쑥 자동 재생된다. 1990년대 패닉이 부른 ‘달팽이’다.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 위해 10년 동안 성난 바다를 표류했던 오디세우스의 아득한 여정이, 지친 몸을 끌며 집으로 향하는 현대인의 무거운 걸음과 훌쩍 뒤엉킨다. 오디세우스로 분한 맷 데이먼은 묘한 기시감을 불러온다. 아, 할리우드가 또 막대한 자원을 들여 그를 집으로 데려와야 하는구나.
흥미롭게도 맷 데이먼의 필모그래피에는 가장 유구한 서사적 원형인 귀향(Nostos)의 갈망이 깊게 둥지를 틀고 있다. 시작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였다. 제2차 세계대전. 어머니는 이미 세 통의 전사 통지서를 받았다. 막내 라이언마저 잃게 할 수는 없었다. 영화는 단 한 사람을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여덟 명이 목숨을 거는 역설을 보여준다. 마지막 “Earn this”(이것을 받을 자격을 갖춰라)라는 대사는 살아 돌아가는 것이 단순한 생환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짊어지는 일임을 일깨운다.
놀런의 2014년 작 ‘인터스텔라’에서 맷 데이먼이 연기한 만 박사는 지구를 대신할 새 터전을 찾아 우주로 떠난 탐사대원이었다. 한때 그는 인류의 희망이었지만, 얼어붙은 행성에서의 긴 고립은 그의 정체성을 잠식해 버린다. 살아 돌아가겠다는 열망은 광기로 뒤틀렸다. 그는 거짓 신호로 동료들을 속였고, 끝내 파멸했다. 만 박사의 비극은 지구와의 거리만큼이나 스스로와도 아득히 멀어졌다는 데 있다.
반면 ‘마션’(2015)의 식물학자 마크 와트니에게 귀향은 포기하지 않는 인간 정신의 아름다운 은유가 된다. 모래 폭풍 속 화성에 홀로 남겨진 그는 절망 가운데 감자 싹을 틔우며 집으로 향하는 길을 개척한다. 그의 귀환은 끝까지 돌아갈 곳이 있음을 믿는 한 인간의 우직한 의지가 어떻게 전 지구적 연대와 만나 기적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한 배우의 작품 속에 이토록 일관된 귀향의 서사가 반복된다는 점은 흥미로운 궤적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 끝에는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가 그린 오디세우스가 서 있다. 맷 데이먼이 연기했던 세 인물은 결국 오디세우스라는 원형 안에 내재된 윤리, 욕망, 의지라는 서로 다른 파편들이다. 오디세우스는 동료의 희생 위에 생의 의미를 짊어진 자였고(라이언 일병 구하기), 생존의 극한에서 유혹에 흔들리는 존재였으며(인터스텔라), 인내와 지혜로 귀환한 생존자였다(마션).
트로이 성을 함락시킨 뒤, 승리한 그리스의 왕들은 각자의 왕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만은 쉽게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트로이 목마를 고안해 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었지만 외눈박이 거인의 분노와 마녀 키르케의 유혹,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저주를 견디며 또 다른 10년의 표류를 감내해야 했다. 전쟁 10년, 귀향 10년. 20년의 세월이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을 잊지 않았다. 요정 칼립소가 제안한 불멸의 삶을 뿌리치고, 그는 유한하지만 자신의 것인 삶을 향해 나아갔다. ‘아무도 아닌 자’에서 시작해 끝내 ‘나 자신’으로 돌아오고야 마는, 실존을 향한 끈질긴 항해였다.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였던 시대. 별빛이 그 길들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철학자 게오르크 루카치는 저서 ‘소설의 이론’을 이렇게 시작한다. 그는 호메로스의 세계를 인간이 아직 ‘선험적 고향(transcendental home)’을 잃지 않았던 세계로 보았다. 신이 존재했고, 세계에는 질서가 있었으며, 인간은 자신의 위치를 알고 삶의 의미도 이미 주어져 있었다. 즉,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였다.
오디세우스는 수없이 길을 잃지만 자신을 잃지는 않는다. 그의 여정은 미지의 목적지를 찾아 헤매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세계와 본래의 자아를 회복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루카치가 진단했듯, 현대는 이 ‘선험적 고향’을 상실한 시대다. 신은 침묵하고 절대적 가치는 사라졌다. 현대인의 여정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기보다 집이 무엇인지 묻는 길에 가깝다. 이념과 증오로 갈라진 세계, 기술적 유토피아의 약속 뒤편에서 작아지는 개인. 세상은 불확실하고 별빛은 희미해졌다.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 아무도 못 봤지만 기억 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 소리 따라서 / 나는 영원히 갈래”(패닉, 달팽이)
오디세우스의 바다는 이타카로 이어졌지만, 오늘 우리의 바다는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다. 목적지도 방향도 희미해진 상실의 시대, 우리는 각자의 이타카를 찾아 헤매는 오디세우스들이다. 2800년 전의 서사가 끊임없이 변주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라이언에서 만 박사로, 와트니에서 오디세우스로. 한 배우가 계속해서 같은 질문의 서로 다른 얼굴을 연기해 온 것처럼, 우리 시대도 같은 질문을 형태만 바꿔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집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나는 여전히 나일 수 있는가. 놀런의 카메라가 다시 그 아득한 표류 위에 우리를 세운 이유는 이 질문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동기 강원대 초빙교수·전 KBS P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