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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억 아파트 자리가 원래 수영장?”… 모래밭이 부촌 되기까지 [서울 상급지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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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를 퍼다 판 돈으로 아파트를 짓다”…1968년 한강 개발의 비밀

 

매일 아침 강변북로를 지나며 바라보는 화려한 한강변 아파트 숲.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초고가 주거지이자 통장에 수십억 원의 현금이 있어야 입성을 꿈꿔보는 대표적 부촌이다. 하지만 불과 60년 전, 이곳은 비만 오면 물에 잠기던 참외밭이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모래섬에 불과했다.

 

서울 한강변의 역사는 곧 대한민국 부의 지형도다. 오늘날 부의 최전선이 된 이촌동과 성수동, 옥수동 일대는 어떻게 버려진 땅에서 ‘신분 상승의 상징’으로 반전을 이뤄냈을까. 정치적 결단과 사람들의 욕망이 얽혀 만들어낸 한강변 역전극의 비하인드를 들여다봤다.

 

1960년대 한강 인도교(현 한강대교) 아래 노들섬 및 이촌동 백사장 인파. 당시 한강변은 지금의 아파트 숲이 아닌 시민들의 거대한 도심 피서지이자 천연 수영장이었다.서울문화재단 제공
1960년대 한강 인도교(현 한강대교) 아래 노들섬 및 이촌동 백사장 인파. 당시 한강변은 지금의 아파트 숲이 아닌 시민들의 거대한 도심 피서지이자 천연 수영장이었다.서울문화재단 제공

 

“못 살겠다 갈아보자”…30만 인파가 모이던 정치의 성지, 이촌동 백사장

 

지금은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동부이촌동 아파트 단지 자리. 불과 70년 전인 1956년 5월, 이곳은 대한민국 정치사를 바꾼 역사적 현장이었다.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사흘 앞두고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백사장에서 대규모 유세를 벌인 곳이 바로 지금의 동부이촌동 땅이다.

 

당시 서울 인구가 150만 명에 불과하던 시절, 무려 30만 명이 넘는 인파가 한강 백사장에 모여들어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외쳤다. 수영장이자 빨래터, 그리고 민주화의 열기가 분출하던 이 광활한 모래밭은 10년 뒤 전혀 다른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모래를 퍼다 판 돈으로 아파트를 짓다…1968년 한강 개발의 비밀

 

변화의 시작은 1968년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한강 개발 5개년 계획‘ 아래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한강변에 대규모 제방을 쌓아 올렸다. 이 제방이 바로 오늘날 서울의 동서를 잇는 강변북로의 모태다.

 

1967년 3월 한강 호안(제방) 공사 현장. 뒤편으로 한강철교가 보이는 가운데, 광활한 모래밭에 깃발을 꽂고 제방을 쌓는 공사가 한창이다. 이 제방이 쌓이면서 생긴 매립지가 훗날 동부이촌동과 강변북로의 기틀이 됐다. 서울기록원 제공
1967년 3월 한강 호안(제방) 공사 현장. 뒤편으로 한강철교가 보이는 가운데, 광활한 모래밭에 깃발을 꽂고 제방을 쌓는 공사가 한창이다. 이 제방이 쌓이면서 생긴 매립지가 훗날 동부이촌동과 강변북로의 기틀이 됐다. 서울기록원 제공

 

당시 예산이 부족했던 서울시는 기발하면서도 과감한 방식을 택했다. 여의도, 잠실, 그리고 동부이촌동 일대에 쌓여 있던 천혜의 한강 모래와 자갈을 대대적으로 퍼내어 건설사에 팔아치운 것이다. 그리고 그 모래를 판 돈으로 한강변을 매립해 육지로 만들었다.

 

“물에 잠기던 모래밭에 누가 살겠느냐”는 비아냥이 무색하게, 매립된 그 땅 위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민영 아파트인 한강맨션과 민영 아파트가 들어섰다. 모래를 퍼낸 자리에 들어선 이 아파트들은 이촌동을 단숨에 고위층과 중산층이 모여드는 서울 최초의 고급 아파트 단지로 끌어올렸다.

 

1980년대 한강 종합개발 당시 골재 채취 및 준설 현장. 서울기록원 제공
1980년대 한강 종합개발 당시 골재 채취 및 준설 현장. 서울기록원 제공

 

252채 헐어내고 세운 아파트…달동네 옥수동의 슬픈 과거

 

이촌동이 일찌감치 부촌의 기틀을 잡은 반면, 성동구 일대의 한강변 라인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 옥수동과 금호동은 경사가 가파른 산비탈에 달동네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고, 성수동은 매연과 소음이 가득한 레미콘 공장과 수제화 공장이 늘어선 준공업 지역이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옥수동은 한강의 경치를 즐기던 ‘두모포’라는 양반들의 유흥지였으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상경한 피난민들이 모여드는 대표적인 서민 주거지로 전락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산비탈을 따라 노후 주택 수백 채가 위태롭게 들어서 있었다.

 

1984년 6월 14일, 옥수 4구역 재개발 사업 기공식이 열리며 당시에 서 있던 노후 건물 252채를 헐어내고 8동 900가구 규모의 아파트(현 옥수 극동아파트)를 신축하는 천지개벽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옥수동은 ‘강남으로 건너가기 위해 지나쳐야 하는 낙후된 배후지’라는 인식을 온전히 벗지는 못했다.

 

1984년 6월 14일 열린 성동구 옥수 4구역 재개발 사업 기공식 현장. 산비탈에 빽빽하게 들어선 달동네 주택 252채를 헐어내고 아파트를 세우며 한강변 주거 지형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서울기록원 제공
1984년 6월 14일 열린 성동구 옥수 4구역 재개발 사업 기공식 현장. 산비탈에 빽빽하게 들어선 달동네 주택 252채를 헐어내고 아파트를 세우며 한강변 주거 지형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서울기록원 제공

 

전두환 정권과 아시안게임…남아있던 모래마저 싹 쓸어간 2차 개발

 

그나마 한강에 남아있던 모래와 섬들도 1980년대 들어 자취를 감췄다. 1981년 9월, 1988 서울 올림픽과 1986 아시안게임 유치가 결정되면서다. 전두환 정권은 외국 손님들에게 보여줄 정돈된 한강이 필요했다.

 

1982년부터 4년간 진행된 ‘2차 한강 종합개발’을 통해 정권은 한강 바닥에 남아있던 모래와 자갈을 싹 긁어 모아 다시 한번 건설 현장에 팔아치웠다. 그 판매 대금으로 올림픽대로를 건설하고 한강 시민공원을 조성하는 공사비를 충당했다. 한강에서 긁어낸 모래들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한강변에 들어설 아파트 공사 현장의 콘크리트로 재탄생했다.

 

1986년 9월, 한강 종합개발 준공식이 열리고 열흘 뒤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가 개막했다. 이어 동호대교(1984년) 개통과 88 올림픽을 거치며 한강변은 완벽한 ‘도시 인프라의 중심’으로 거듭났고, 강남 접근성이 확보된 옥수동과 한강 조망권을 쥔 아파트들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

 

1980년대 동호대교 개통 및 한강 종합개발 모습.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유치는 한강의 모래를 지우고 현대적 도시 풍경을 완성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서울기록원 제공
1980년대 동호대교 개통 및 한강 종합개발 모습.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유치는 한강의 모래를 지우고 현대적 도시 풍경을 완성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서울기록원 제공

 

“입지는 정해지지 않는다”…다음 50년의 상급지는 어디인가

 

불과 한 세대 만에 정국의 소용돌이였던 백사장과 참외밭은 초고층 아파트 숲으로, 달동네와 공장지대는 부의 상징으로 탈바꿈했다. 한강변의 역사는 부동산의 가치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인프라 투자와 정치적 이벤트, 그리고 시대적 욕망에 따라 언제든 다시 그려질 수 있음을 증명한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상급지의 공식 역시 영원하지 않을 수 있다.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노선 개통과 도심 재개발, 한강변 층수 제한 완화 등 새로운 도시 계획의 바람이 또다시 서울의 지도를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무심코 지나치는 어느 낡은 골목이나 비어 있는 공터가 30년 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땅으로 변해있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늘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반전을 만들어왔다.

 

반포동 한강변의 랜드마크로 들어선 래미안 원베일리 단지 입구. 60년 전 모래를 퍼내고 정치적 서사를 품은 채 쌓아 올린 한강변은 이제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하이엔드 주거 타운이 됐다.양다훈 기자
반포동 한강변의 랜드마크로 들어선 래미안 원베일리 단지 입구. 60년 전 모래를 퍼내고 정치적 서사를 품은 채 쌓아 올린 한강변은 이제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하이엔드 주거 타운이 됐다.양다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