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야 했을까?”라는 질문은 과거에 대한 질문이다. 과거에 어떠한 일이 있었고 그에 대한 대응이 있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그때의 대응이 최선의 방법은 아니었을 수 있다는 후회와 회한이 깃든 질문. 좀 더 나은 방법은 없었을까? 있다면 그건 무엇이었을까, 라는 시차를 둔 질문. 후지노 도모아키 감독은 조현병으로 오랜 시간 고통받은 누나, 그리고 이에 대응해 온 자기 가족의 역사를 20년간 기록한 끝에 ‘어떻게 해야 했을까(どうすればよかったか)’라는 작품을 완성한다.
오프닝에서 감독은 “이 영상은 누나가 조현병에 걸린 이유나 조현병이 어떤 병인지를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영화를 시작한다. 그들은 유복한 가족이었다. 부모님 모두 의사였고 독일 유학을 할 만큼 경제적으로도 여유 있는 집안이었다. 그런 부모에게서 태어난 누나 역시 자연스럽게 의사의 길을 지원했고 나중에 감독이 된 아들 역시 비슷한 꿈의 언저리를 맴돌기도 했다. 불행은 그 무렵 찾아왔다. 힘들게 의대에 진학한 누나는 대학 시절에 첫 번째 발작을 일으키는데 부모는 그녀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는 대신 집 안에 머물며 국가고시를 준비하게 한다. 이후 가족의 일상은 끔찍한 고통으로 변해간다. 아들인 감독은 집을 떠남으로써 그 상황을 모면한다. 누나의 발병 이후 9년이 지나서 그는 처음으로 가족의 음성을 녹음하기 시작했고 2001년부터 본격적으로 가족을 촬영한다. 누나의 발병 이후 거의 20년이 되던 시점이었다.
부모가 문제 해결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감독은 가족 문제에 좀 더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한다. 자물쇠가 채워진 집안에 감금된 누나, 그리고 딸의 수발 끝에 치매로 무너지는 어머니. 감독의 카메라에는 당시 의료체계에 대한 부모의 불신, 가족에 닥친 불행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부모의 두려움과 수치심이 복잡하게 드러난다. 많은 관객이 자물쇠가 채워진 현관문을 보며 충격에 빠지고 딸의 치료를 회피한 부모에게 분노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신병동 역시 굳건히 자물쇠로 채워진 폐쇄된 세계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의료 행위와 학대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 역시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행위가 사적 공간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에 시각적 충격을 받을 수 있지만 환자와 가족이 함께 앓는 병의 특수성을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비난하는 것에는 주저하게 된다. 가족의 책임과 사회적 책임의 문제가 복잡하게 맞물려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최대한의 자제력을 보여준다. 때로는 사운드와 이미지를 분리하여 참혹한 시간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관객의 즉자적 감정 반응을 차단하려 한다. 영화는 놀랍도록 절제되어 있다. 누군가의 선택을 비난하기보다는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행위와 실패의 경험을 내부자의 시선에서 공유함으로써 이 가족의 경험에 대해 차분한 관찰을 요청한다. 이 가족을 보다 보면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가족이 떠오른다. 아내와 딸을 떠나보낸 후 카메라를 든 아들과 대화하는 늙은 아버지에게서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페르소나인 류 지슈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던진 마지막 질문이다. “실패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아버지의 대답. 영화를 공개해도 되겠느냐는 아들의 질문에 괜찮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대답에는 수십 년 지속된 가족의 아픔을 공적 영역으로 확장해도 좋다는 망설임 끝의 결단이 엿보인다.
맹수진 영화평론가

